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여기저기서 들어본 핫한 책, 도서관 신착도서 코너에 가지런히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몇 장 읽다가 그만 밑줄을 팍팍 긋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결국 온라인서점에서 주문했다.
열심히 밑줄 긋고 읽었음에도 여전히 이 책은 알 듯 모를 듯하다. 그럴 때는 정의부터 살펴보자. 먼저 상황. “맥락이나 주변 환경, (가끔은) 플롯을 의미”(18쪽)한다. 이야기. “작가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감정적 경험, 혹은 통찰과 지혜, 혹은 작가가 전하고픈 말이다”(18쪽). 이쯤 되면 눈치채게 된다. 아, 이야기에 대한 책이구나. 상황에 대한 나열을 넘어 자신의 감정적 경험, 통찰과 지혜는 무엇이고, 그걸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책이구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작가의 페르소나, 서술자다. 작가와 서술자는 어떻게 다른 걸까? <상황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상황을 ‘겪는’ 것이 나라면, 이 상황을 ‘해석하는’ 것은 서술자라고. 서술자는 “경험은 원료에 불과”(12쪽)하다는 것을 아는 존재, “끊임없이 빠져드는 사건의 너저분한 흐름을 명확한 형태로 빚어내”(31쪽)려는 존재, "우리의 여정을 함께 하고, 글을 완성시키고, 우리의 시야를 전보다 넓혀주리라 믿을 수 있는"(31쪽) 존재, “힘겨운 경험을 할 때조차 그 순간을 더 넓은 시야로 이해하고자 하는 공통된 욕구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31쪽) 보여주는 존재라고.
서술자에 대해 설명하며,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유명한 책 <사나운 애착>을 쓰는 과정을 묘사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여자-엄마, 그리고 옆집 여자-의 삶은 여자의 인생에서 남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거기에서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자신 역시 엄마처럼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비비언 고닉이 <사나운 애착>에서 전하고자 했던 통찰과 지혜였다. 이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어조를 찾아야 했고, 평소 사용하던 문장 구조를 버려야 했고,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멀찍이 물러나 유용한 관점을 찾아야 했다. 어조와 문장 짜임새, 관점의 적절함을 얻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서술자를 만들어낸다.
내게는 나를 위해 싸워줄 서술자가 있었다. 이 서술자는 자신이 곧 어머니처럼 되었기에 그 곁을 떠나지 못한 여자, 바로 나였다. “또 혼자”라는 상황에 겁먹지 않는 서술자. 생각해보면, 그는 도시를 걸어다니는 사람, 혹은 이혼한 중년의 페미니스트, 혹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작가인 나에게도 크게 휘둘리지 않았다. 이 서술자는 그저 견고하고 제한된 자아로, 중심을 잘 잡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내가 해낸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페르소나를 창조해낸 것이다. 30쪽
비비언 고닉은, 그리고 그가 예시로 드는 탁월한 작가들은 “어떤 통찰 위에서 글을 구조화했으며, 이런 통찰에 적합한 페르소나를 창조했다”(30쪽). 그 페르소나는 조지 오웰의 그것처럼 제국주의의 비인간성을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국주의의 부조리 한가운데 내던져진 남자일 수도, 애컬리의 그것처럼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경험과 관점, 개성을 버무려 의도적으로 페르소나를 만들 수 있지만, 고닉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진실을 향한 노력 그 자체인 것 같다. “제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거저 얻은 확신에서 벗어나 진중한 재검토로, 명확한 자기 이해로 옮겨 가려-애쓰는 정신”(45쪽)과 마주할 때, 독자는 서술자에 대해 매력을 품고, 신뢰를 갖게 된다.
고닉은 이 책에서 에세이와 회고록을 분류하고, 각각의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에세이는 자신이 아닌 외부 주제(세상)를 탐구하는 것에, 회고록은 외부 주제(세상)를 통해 작가 자신을 탐구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론 각각의 글이 이런 분류법으로 똑 나누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고닉이 에세이와 회고록 파트에서 다루는 내용은 서로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에세이가 (페르소나를 이용해) 외부 대상에 대해 쓰는 글이라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적절한 거리감. 정희진 선생님이 여러번 강조하셨듯, 대상과 나를 동일시해도 대상에게서 멀찍이 물러서도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익숙한 말이지만, 대상에 대한 공감, 감정이입이 좋은 글을 만든다. ("거리를 ‘잡는 것’(포지셔닝 혹은 주제 파악)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거리 두기와 동일시는 자신을 이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반면,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가능한 공감과 연대는 어렵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 쓴다>, 116쪽)
대상에 대한 공감이 타자를 타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라면, 자기 자신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라야 글 안에서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역동성을 얻기 위해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44쪽
고닉은 자기 폭로를 보여주는 에세이, 그리고 “단순히 자아의 균열을 보여주려고” 쓴 에세이를 예시로 들어 설명하는데, 둘의 차이는 알 듯 모를 듯 하다.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 자기기만을 이해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폭로한 것(전자)이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경험을 해석하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은밀한’ 자기폭로로 나아간다는 것(후자)을 뜻하는 걸까? 스메들리의 <대지의 딸>에서처럼, 자신의 부정직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라도 서술자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과정에서 은밀하게 자신의 ‘진짜’ 이야기(="내적 맥락"184쪽)를 드러낼 수 있다. 고닉은 이렇게 서술자가 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를 발견할 때 환호하는 것 같지만, 나는 자기가 진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지 모르는 채로도 진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게 한계가 아니라 매력이 될 수도 있다고요, 고닉 선생님?
회고록에서도 중요한 것은 서술자가 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 이면의 이야기이다. 아프리카나 성애의 시작, 도보 여행의 추억에 대한 것이라도 진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고독에 대한 불안’인 것처럼. 하지만 이 이야기를 ‘나 너무 외로워’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필터, 대상이 필요하다. “자아의 고독이 진정한 주제라면, 자신을 훨씬 넘어선 주제를 필터로 삼아서 말할 때 일반적으로 더 좋은 회고록이 나온다”(158쪽). 이 필터가 필터일 뿐임을 이해한다면, 실제 사건의 나열은 중요하지 않아진다.
글쓰기에 대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정희진 선생님의 문장이다. 비비언 고닉 역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회고록 속의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당면한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독자가 믿게 될 때 진실이 얻어진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07쪽
사실 상황의 나열은 쉽다. 솔직할 수만 있다면. 그걸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하지만 비비언 고닉이 반복하는 말. “자신의 인격을 형성한 경험을 명확히 하려는 고투”(136쪽), “이 통찰을 밀어붙여 작가의 주된 원칙으로 만든 집중력”(136쪽) “작가가 당면한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107쪽)…. 글을 쓰고나면 몸의 모든 기름이 빠진다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될 것 같기도. 글쓰기, 그거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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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니요. 무엇에 관한 이야기냐니까요?" 라고 다시 물었다. 그 순간 나는 학생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내적 맥락을 찾는 것이다. 내적 맥락은 글을 현재 상황 너머로 확장해주고,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밝혀주며, 형태를 부여하고 내밀한 목적을 드러내준다. 상상력 풍부한 작가를 아무나 붙잡고 "그런데 무엇에 관한 이야기죠?"라고 물어보면, "신시내티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고 답하는 대신 내적 맥락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곧 작가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일 때까지 계속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더 큰 생각은 무엇일까? 진정한 경험은? 진짜 주제는? 내게 중요한 것은 답을 찾을 수 잇느냐가 아니라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느 평범한 독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왜 쓰고 있느냐를 아는 일이었다. 수업을 이어나가면서 나와 학생들은 이 일이 치열한 전쟁과도 같다는 사실을 거듭 발견했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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