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노동계급 출신 지식인 디디에 에리봉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 랭스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가족과 몇 십년간 단절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회한이 아니다. “방금 세상을 떠난 이를 이해하려는 의지와 그보다 오래 살아남은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의지”(19쪽)였다.
그러나 그것은 애도를 경험하는 다소 이상한 방식이었다. 방금 세상을 떠난 이를 이해하려는 의지와 그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슬픔을 능가하는 애도. 19쪽
그는 질문한다. 나는 왜 동성애자로서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천착했으면서도 출신 계급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않았지? “당신 형 디디에는 가족을 버린 호모일 뿐이잖아.” 동생의 아내가 했다는 이 대사는 에리봉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가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교육을 받고 가족과의 단절을 시도할 때, 그 단절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교육 체계로부터 축출하지 않으려면-혹은 축출당하지 않으려면- 내 가족과 내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축출하지 않으면 안되었”(188쪽)기에, 학교교육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욕설, 반항, 마초적 태도 같은 계급적 성향을 지워야 했다. 또한 그에게 노동계급 가족은 지식인들의 환상 속 ‘민중의 희망’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적 안락만을 추구하는 그들의 속물적 태도가 싫었고, “정치적으로 노동자의 편이면서도 내가 일정 부분 그들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80쪽)다는 분열적 태도를 가진다. 무엇보다 단절은 세계를 분리하는 경계선을 당연시하지 않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발명해내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 세계들을 분리하는 경계선들은 각 세계의 내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없는지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상상하고 지각하도록 규정한다. (...) 이는 단지 사물의 질서일 따름이며,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그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려면 스스로를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삶과 타인들의 삶에 대해 내려다보는 시각을 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가 그렇듯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엄혹한 논리를 벗어나 기회와 가능성의 불평등한 분포라는 끔찍한 불의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구획선의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
성공적인 학교 교육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 중 하나로서 내 안에 단절, 더 나아가 배의 계기를 심어놓았고, 그 단절선은 점점 더 두드러지면서 나를 나의 출신 세계이자 내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세계로부터 떼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유배가 그렇듯, 어떤 형태의 폭력을 포함했다. 그 폭력은 내 동의에 따라 행사된 것이기에, 나는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나 자신을 교육 체계로부터 축출하지 않으려면-혹은 축출당하지 않으려면-내 가족과 내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축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두 영역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 충돌 없이 이 두 세계에 속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188쪽
에리봉이 자신의 계급에서 벗어나고자 애쓴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동성애자 정체성 때문이었다. 노동계급 남성의 마초적 태도, 동성애 혐오 분위기 속에서 그는 동성애자로서 자신을 정체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되어가고 있던 존재(동성애자)가 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의 자기를 창조해야 했고, 랭스를 떠나 파리로 갔다. 그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자신이 되어야 했을 모습을 거부한 것이었을지라도.
에리봉의 자기분석은 무척이나 건조하다. 그는 감정적인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는 정제된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정적 부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 그는 사르트르, 부르디외, 푸코 등의 이론, 그리고 큰 영감을 얻은 아니 에르노, 장 주네의 소설을 빌려 자신의 과거를 해부한다. 거기에는 어떤 회한이나 후회 등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무미건조한 책을 읽으며 저마다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다. 나는 에리봉처럼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직업적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지만, ‘계급탈주자’로서 그가 겪는 분열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다. (내가 만약 책을 낸다면 우리 엄마는 말할 것이다. “무... 무슨 책이라고?”) 우정 속에서 “아비투스의 관성 효과에 의해 두 계급이 맞부딪”(196쪽)히는 폭력에 대해, 학교 교육에 성공적으로 적응할수록 가족과 멀어지는 혼란에 대해, 가족의 어떤 면모들이 불러일으키는 혐오의 감정에 대해, 누구든지 조금씩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돋보였던 수치에 대한 해석. 에리봉은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일은, 사회질서가 부과한 정체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에리봉이 동성애자로서 자신을 정체화할 때, 이 정체화의 뒷면에는 이성애자를 디폴트값으로 두는 사회가 있다. 그렇기에 이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모욕과 수치심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욕을 당하고, 그것을 재전유하고, 또 모욕을 당하고, 또 재전유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 질서의 힘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며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이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공중 앞에서 입을 다물고 감추고 부정되어야 하는 욕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조롱당하고 낙인찍히고 정신분석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내다가, 일단 공포의 단계를 극복하면, 그 존재의 권리가 때로는 연극적이고 과장되고 공격적이고 ‘과도하고’ ‘종교적이고’ ‘투쟁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확인되고 재확인되고 선언되어야 하는 욕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러니까 특유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품은 채로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경험하는 욕망, (길에서, 직장에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이 욕망 말이다. 더더구나 이는 모욕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인 수신자가 아니라도 듣게 되는, 비꼬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폄훼하고 창피를 주는 온갖 말들로 인해 가중된다. (...) 그러한 경험 속에서 그들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음을, ‘사적인 것’조차 공적인 영역의 산물임을, 즉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정신 현상조차 성적 규범성의 명령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매일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모욕은 현실적이든 잠재적이든-그러니까 실제 모욕이든, 아니면 난데없이 튀어나와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는 모욕이든, 그것도 아니면 언제 어디서나 늘 우리를 꼼짝 못하게 폭력적으로 에워싸고 있다고 느껴지는 모욕이든 간에-세계와 타자에 대한 관계의 지평을 구성한다. 234쪽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다시 표명하는 일은 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주조하기 위한 느리고 인내가 필요한 작업을, 사회질서가 우리에게 부과했던 바로 그 정체성으로부터 수행해나간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모욕과 수치심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종종 잊고 있었던 경고를 매순간 날리며, 우리가 잊고 싶어하는 감정을 일깨운다. (...) 우리는 아주 평범한 상황들 속에서 그러한 것을 알게 되고 경험하면서 예기치 않은 충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이제 그러한 것들에 면역이 되어있다고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가하는 모욕의 힘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고프먼을 따라 말하자면, 낙인을 전복시키거나 모욕을 재전유하고 재의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상처를 입히는 욕설의 작용과 그것의 능청스런 재전유 사이에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우리는 사회질서와 그 예속화하는 힘이 매 순간 모든 이에게 가하는 무게에서 어느 정도까지만 해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이 훌륭하게 표현한 것처럼, 수치심이 ‘변형 에너지’라면, 자기 변형은 과거의 흔적들을 통합하지 않고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보존한다. 256-257쪽
+ 이 책에 대한 신새벽님의 재미있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