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 도나스, 『엄마됨을 후회함』
수박이나 딸기는 나를 위해 사지 않는다. 삼계탕용 한약재, 청포묵, 콩가루 같은 한번도 사보지 않은 식재료를 주문한다. 문화센터 선생님의 과장된 말투와 시끄러운 음악에 익숙해진다. 문화센터 수업이 끝난 후 엄마들과 나누는 특별할 것 없는 대화에도, 은이엄마라는 호칭에도. 육퇴 후의 시간을 제외한 내 일상은 온통 아이의 것이다. 내 마음도, 무얼 하고 놀아주지, 내일은 뭘 먹이지 같은 고민들로 가득찼다.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일상이 변하고, 존재가 변하고 있다.
가끔 믿기지 않는다. 이게 내 삶이라고? 이게 내 얼굴이라고? 이게 내 아이라고? 종종 이유 없이 허전해 밤잠을 뒤척이고, 종종 자라나는 아이에 대한 경이로움에 가슴이 벅차다. 문장의 순서를 바꿔도 좋다. 종종 자라나는 아이에 대한 경이로움에 가슴이 벅차고, 종종 이유 없이 허전해 밤잠을 뒤척인다. 이 완벽한 모순의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애를 갖지 못했다. 과배란 주사를 시간 맞춰 배에 찔러넣을 때마다 물었다. 왜 아이를 갖고 싶은가. 생명에 대한 본능적 이끌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엄마 아빠에 대한 부채의식? 평범한 인생 행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 <엄마됨을 후회함>의 많은 인터뷰이들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고민해보지 않았으며, 고민했다면 아이를 갖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고민했지만 뚜렷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를 가져본 적 없기에, 아이를 가졌을 때의 기쁨은 알지 못했다. 반면, 아이를 가졌을 때 현실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알았다. 시간과 체력과 에너지, 어쩌면 직업과 진로까지도. 그래도 아이가 갖고 싶었다.
점점 아이의 키가 자라고, 달큰한 땀냄새가 나고, 엄마의 무쌍과 아빠의 찡그린 미간이 섞인 자기만의 얼굴이 여물어가고, 표현과 주장이 다양해진다. 자라나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커질수록 내 깊은 곳 어딘가의 상실과 외로움도 옅어져가는 것 같다. 나 없이 아이와 공원에 다녀온 엄마가 ‘은이가 한손엔 나 한손엔 아빠 손을 붙잡고 꽤 오래 걸었어, 비둘기와 멍멍이를 가리키며 어!어! 하더라’, 따위의 이야기를 할 때 엄마 볼에 어린 설렘을 목도할 때도. 그런데 나는 왜 <엄마됨을 후회함> 속 인터뷰이들의 이런 말들에 가슴이 쿵하는가.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다 지나간다’라고만 말했어요. (...) 장에 가스가 가득 차서 아이가 잠을 설치는 시기가 있었는데 주변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별거 아니야. 조금 있으면 다 지나가. 좀 있으면 너는 다시 한 줄기 빛을 보게 돼. 곧 모든 게 좋아질 거야.’ 하지만 여러 달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있잖아, 세 달째에는 아이의 장에 가스가 차. 그리고 일 년 후 이가 나는 시기가 와. 그런 다음에는 사춘기 문제가 생겨. 그러고 나면 군대를 가야지. 넌 아이를 가진 거야. 행운을 빈다.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아. 매 시기마다 각각 다른 문제와 할 일이 있단다. 그러니까 멀뚱이 뭔가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아마 그때가 깨달았던 순간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이들을 언제나 껴안아주고만 싶어요. 더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죠. 아이와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요. 그래요. 어릴 때는 그야말로 친밀한 결속감이 있어요. 어쩌면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모든 것을 가져가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가요.
내가 공부를 마쳤다면 어땠을까? 경력을 쌓고 돈을 벌었다면 훨씬 좋았을까? 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합니까? 다 시간낭비일 뿐이죠. 절대 시간낭비에요. 이미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았는지 아세요? 아, 이 말도 적당치 않네요. 완전히 통째로 아름다운 순간들이죠. 하지만 그 순간들이 요구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이 인터뷰이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간다. 아이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나의 일상과 존재는 변했다. 가끔은 내가 이대로 소멸하는 것이 아닐까 두렵고, 그럼에도 나를 위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에 망설인다. 무엇을 시도하든 그만큼 아이와의 시간, 에너지를 포기해야 하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잠든 아이를 볼 때면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해본 적이 있나 싶으면서도, 정성껏 차린 밥을 바닥에 집어던지는 아이에게 맹렬히 화가 난다. 거의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으면서도, 잘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때로 죄책감을 느끼고, 때로 ‘뭐 어쩌라고’ 싶다. 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평생 계속될 것이다.
후회하냐고? 후회는 아니다. 다만 나는 충만한데 허전하고, 사랑하는데 밉기도 한, 이런 완벽한 양가감정은 처음이다. 그래서 이 압도적인 감정과 경험 속에 어벙벙하다. <엄마됨을 후회함>의 저자 오나 도니스는 '엄마의 고통, 그리고 아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과 미움은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엄마 자신에게 계속 몰아대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낯선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길을 찾아가고 싶다. 그 길은 아이의 살내음을 맡고 함께 까르르 웃으며 아이의 지금을 만끽하는 길, 잠잠히 생각하고 읽고 쓰는 길, 내가 설레고 잘할 수 있으며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는 길 속에 있을 것이다.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 대개 끝없는 반응들이 연결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현실로 마무리된다. 여성의 육체와 인생은 지금부터 어떤 것이 ‘좋은 엄마’이고 어떤 태도와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비롯된 감정적인 갈등상황의 중심이 된다. 이 상황은 아이의 인생과 장래의 불확실성을 책임져야 하는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마들은 이런 갈등상황, 때로는 아이의 발달과 특성에 따라 이런저런 순간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에서 착취당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엄마가 제일 잘 안다”는 규칙 아래 살아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자상하고, 너무 멀리하고, 너무 지배하고, 과잉보호를 하고, 냉담하고 독립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유년기 때 옆에 잇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반대로 아이 옆에 없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 비난은 엄마들이 가진 반대감정의 양립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학자, 작가, 다양한 분야의 임상의들 간에는 건강한 반대감정의 양립은 엄마들 경험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특징이자 다양한 감정의 하나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 갈등감정은 엄마들로 하여금 두 가지 반대감정의 양립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하나는 견딜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견딜 만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이것은 감정의 발달을 촉진할 수 있다. 따라서 엄마의 고통, 그리고 아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과 미움은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엄마 자신에게 계속 몰아대는 감정이다. 결국 아이와 아이의 욕구를 이해하기 위한 이성적, 감정적 도구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엄마와 아이에게 중요한 심사숙고도 가능케 한다.
이 견해에서 보면 반대감정의 양립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는 능력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엄마 자신과 아이의 완벽함을 포기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갈등을 다루는 법을 배우면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걱정, 연민과 분노, 실망, 좌절, 무기력 등을 동시에 느낄 능력이 생긴다. 아이들의 풍부하고 다양한 인성에서 새로운 측면을 볼 수 있어 아이들 발달에도 전환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