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고위험산모실 입원, 조산, 두달간의 니큐생활, 퇴원 후의 육아와 외래와 재활, 지난 일년간의 사실들이다. 지난 일년간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는 임신 29주만에 태어난 은이가 얼마나 예쁘게 자라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위험과 고비를 씩씩하게 넘겨줬는지, 그 생명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자랑인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때때로 내 안에 감도는 이야기는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실패감, 끝없이 하강하는 서러움, 누군가를 향한 원망과 끈질긴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닌데.
철학자 찰스 그리스월드는 자신의 책 용서에서 말했다.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오래된 상처를 어떻게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나는 잘 안다. 이야기를 하는 이는 물 긷는 장치에 묶인 낙타처럼 계속 원을 그리고 돌면서 부지런하게 비극을 길어 올리고,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그때의 감정도 되살아난다.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 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은이가 태어나고 몇 달 뒤, 위로의 톡을 보낸 지인에게 보낸 답톡은 이랬다. ‘이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성찰하고 싶어요’. 지인의 답톡은 이랬다. ‘의미, 그런 거 없어요’
비극적인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때로 폭력적이고 인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안다. 그러나 한 줌의 의미라도 없다면, 내가 겪은 일이 너무 서럽다는 생각. 그러니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내 삶의 일부나마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꾸고, 그렇게 비극적인 사건을 관통해가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 여름, 야금야금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을 읽었다. 육퇴 후 리베카 솔닛의 문장 사이를 헤매는 시간은 정처 없이 행복했다. <멀고도 가까운>은 책에 언급된 시각 예술 작품 ‘진로’를 닮았다. 관람자가 암흑 속을 헤매며 입구와 같은 출구를 찾아가는 미로를 형상화한 ‘진로’처럼, 이 이야기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의 집 마당에서 딴 살구들로 시작해 체 게베라, 프랑켄슈타인, 눈의 여왕, 아이슬란드의 늑대, 남편과 아이의 시체를 뜯어먹을 수 밖에 없었던 에스키모 여인의 이야기를 거쳐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온다. 평생 자신을 질투하고 못마땅하게 여긴 그 어머니.
저자가 어머니를 어떻게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었는지,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 비슷한 시기 진행된 자신의 투병, 애인과의 이별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될 법한 그 메시지들은 가려져 있다. 명확한 메시지 대신 끝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이 에세이는 저자가 그랜드캐니언의 래프팅을 하며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으로 끝난다. 흘러가는 강물, 내려가는 동안 끝없이 펼쳐지던 풍경이 시사하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드러내면서. 그 어렴풋함 속에서 나는,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에 둘러쌓여 살고 있다고, 어떤 이야기를 선별하고 다듬을지 사람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고, 보다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서 빠져나오는 이야기, 누군가와 연결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가랑비에 옷 젖듯 그 이야기에 젖어들어갈 때 우리는 조금씩 변할 것이라고, 끄덕였다.
다시, 나의 이야기는, 지난 일년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은이가 코를 찡그리며 아랫니 두 개를 내놓고 깔깔거릴 때,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들 때, 작고 통통한 손으로 내 바지를 꼭 쥐고 잠들 때, 잠든 은이의 맑고 해사한 얼굴을 바라볼 때, 내 마음 속에는 몰랑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건 감사, 기쁨 같은 걸로 번역될 감정. 때때로 잠들기 전이면, 고위험산모실 입원부터 갑작스런 출산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다시 돌아가 바꾸고 싶은 장면들이 가득가득 떠올랐다. 은이의 건강에 대한 염려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새로운 발달 단계마다 불안, 초조, 근심을 생성했다. 그간 겪어보지 못한 가장 큰 기쁨과 가장 큰 고통. 이 기쁨과 고통 모두 아이의 탄생으로 인한 것이었다.
가끔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삶 하나는 이야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이야기를 전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삶은 온갖 사연으로 가득한 은하수 같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몇 개의 성운을 고를 수 있을 뿐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기쁨과 고통의 이야기, 무엇이 더 무거울까.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아이를 낳고 이른둥이방과 이른둥이카페를 들락거리며 많은 이야기를 보았다. 내가 겪지 못했던 수많은 수술을 겪은 아이들, 기적적으로 퇴원해 엄마 품에서 웃는 아이들, 하늘의 별이 된 아이들. 아직도 가끔 생각하는 아가가 있다. 같은 병원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아가 엄마는 종종 늦은 밤 이른둥이방에 아이 소식을 올렸다. 엄마는 교수가 둘째를 얼른 가지라고 한다며 하소연하고, 퇴원하더라도 장애를 가질 아이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가게를 시작했다고 알리고, 아이 없는 집, 니큐에 가져다줄 가재수건을 열맞춰 널어놓은 빨래 사진을 올렸다. 같은 공간에서 힘든 싸움을 싸우고 있는 그 아가를 생각하며 나는 자주 울컥했다. 아가는 500일 넘는 시간 동안 숱한 고비를 넘겼고, 고비가 잦아지고 엄마가 병원 주차장에서 밤을 새는 날이 많아지다, 어느날 별이 되었다. 그날은 하루종일 하늘도 어둑어둑했다. 나는 ‘긴 시간 용감히 싸운 oo를 이른둥이방 이모가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라고 더듬더듬 자판을 두드렸다.
재활을 다니며 만난 이른둥이 엄마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늘 웃는 얼굴의 아들둥이 엄마는 갑작스럽게 26주에 덜컥 출산을 했다. 혈압이 계속 떨어지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첫째를 인큐베이터 채로 구급차에 태워 전원을 하고, 곧이어 둘째도 혈압이 떨어지는 위급 상황이라 전원하다 큰 사고가 날 뻔 하고, 먼저 퇴원한 둘째의 육아를 하며 첫째의 면회를 다니고, 장루를 낸 채로 퇴원한 첫째의 장루를 직접 갈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거에요. 지금 내 앞에 아가가 있는데,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해요? 교수님한테 그렇게 물어보면서 울었어요.’ ‘둘째만 먼저 퇴원하던 날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원래는 면회가서 둘다 보고 인사하고 오는데, 하나는 남기고 오는 거잖아요.’ ‘첫째 장루 닫는 재수술하느라 수술실에 보냈는데 1시만에 배만 닫고 나온 거에요. 상태가 심각해서 수술 못한다는 말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어요.’ 이런 말들을 들으며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정말 고생했어요’가 전부였다. 그 시간들을 겪고도 아들둥이 엄마는 ‘언니 언니’ 하며 늘 웃는 얼굴이고, 아들둥이는 교정 돌이 지나 아장아장 걷고 윙크도 한다.
사람은, 삶은 잘 변하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우리는 자주 특별하거나 어마어마한 문제를 마주하면서도 거기에 그저 그런 대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버리는 때가 있다.’ 가까스로 사람이 변할 때가 있다. 내가 무언가 변한다면, 지금이 그때이지 않을까, 그때여야 하지 않을까. 내 안을 좀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울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영웅이다. 다른 이야기라는 무대에 우리를 세워 놓고 그렇게 작아진 스스로를 보는 것, 당신과 관련이 없는 세상의 광활함을 보는 것도 바라보기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능력을 보고,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나가고, 다른 사람의 삶을 만들고 혹은 그것을 부수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되기보다는 우리가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