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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Jun 29. 2024

엄마도 집에 들어가기 싫은, 그런 날 1

아직 해도 넘어가지 않은 환한 6월의 저녁 6시. 집에 가는 길에 둘째가 학원 앞 놀이터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딸은 금세 푸스(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세상에 이런 너그러운 엄마가 있나 싶게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늘 오케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오랜만의 놀이터 타임이다.


"오예!"


아들은 저만치 앞서 가더니 그새 친구를 만나 자전거로 동네를 누비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놀이터 지박령 자리에 앉았다. '놀이터 대기 몇 년 더 해야 해?' 친한 언니랑 동생에게 톡을 보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 두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았다. 


'저 집 엄마 이제 일 다니나 보네.' '쟤는 집에 가서 밥 먹지 이 시간에 라면이야.' '쟤들은 사촌지간이라는데 꼭 자매 같네.', '아기 추운데 뭐 좀 덮어주지 멋을 너무 부렸다.' '중학생들은 이 시간에 학원을 가는구나.' '어머어머, 저 아줌마 여자축구하나 보다! 유니폼 멋지다.' '저 집 엄마 요 앞에서 가게 하던데 아빠는 친구랑 놀러 가나 보네.' 머릿속으로 온갖 참견을 일삼았더니 한 시간이 후딱 갔다.




저녁 7시. 여전히 날이 밝다. 이 시간이면 나는 설거지를 하고, 애들은 씻고 있을 시간이다. 숙제도 해야 하고, 영어 동화도 들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바람이 너무 좋다!

엄마도 가끔은 집에 들어가기 싫다. 똑딱똑딱 초단위로 움직이는 저녁에서 비껴 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 팔의 솜털을 살짝씩 간질이는 선선한 바람과 조금 있으면 분홍빛으로 물들 참인 하늘까지. 도저히 집에 그냥 들어갈 수 없는 여름밤이다. 이 온도와 이 습도. 맥주 한 잔 딱 하면 좋은 날씨. 친구까지 옆에 앉아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편의점 커피로도 충분하다. 이미 이곳은 이탈리아 어느 광장카페테라스다.

 

그림 같은 붉은 노을이 사라지자마자 목 뒤로 오소소 찬바람이 들었다. 아직 저녁도 못 먹었는데 8시라니. 조급해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김밥 세 줄이랑 하이볼 한 캔을 사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우리 다시는 이렇게 못 놀아. 시간이 몇 신데 아직 씻지도 않았잖아." 군소리를 주렁주렁 달고서.




이것저것 하다 눈 깜짝하니 10시다. 아이들은 아직도 끝내지 못한 일들로 씨름한다. 두 눈에 피곤이 가득하다. 피곤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두 시간 동안 입도 안 떼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더니 온몸에 한기가 들어 긴팔을 찾아 입었다.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나도 눈이 감긴다. 아니야! 정신 차려! 하이볼 마셔야지!


얼마 전에 시작한 드라마를 틀어놓고, 김치냉장고에 넣어둔 레몬 하이볼을 꺼냈다. 오늘은 변수의 연속이었지만 이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해방과 안식의 기쁨을 준다. 남은 김밥을 안주 삼아 한 모금 들이켰다. 극락이다.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훅훅 간다. 눈앞의 모니터가 아득해진다. 배도 안 부른데 이렇게 취하다니. 너 가성비가 좋구나.


식탁을 치우면서 이를 닦고 문단속을 하고 침대로 들어와 잠든 딸을 안았다.



이런.




열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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