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신영복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는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인식할 것인가’를 핵심 질문으로 삼고 있다. 강의의 키워드는 '관계'다. 책은 고전을 통해, 그리고 저자의 삶을 통해 관계에 기반한 존재와 인식, 그리고 변화를 설명한다.
나는 저자의 '관계론'이 여전히 어렵고 이를 쉽게 설명할 수도 없다. 대신 내 삶을 이해하는데 적용해보기로 했다. 미혼인 분들에겐 공감이 안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본질은 동일하다. 사람을 통해 누구나 겪게 되는 관계의 문제들에 대입해보면 얼추 관계론의 얼개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광범위한 관계망 속에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강의도 관계와 인식의 문제에서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결혼은 ‘관계망’을 공유하는 사건이다.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부모님에게 인사를 가고 친척들, 친구들을 소개하며 때로는 회사, 교회, 동호회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상견례에서 맛보는 극한의 어색함부터, 청첩장을 돌리기 위해 서로의 친구들을 만나는 긴장되는 순간까지. 그 과정이 멋쩍어 다소 늦을 수는 있지만 그 시간은 반드시 온다.
나와 너의 결혼인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동안 뿌려왔고 앞으로도 뿌려야 할 축의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관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인도에 떨어져 있지 않는 한 관계가 부재한 삶은 없다. 아니, 무인도에 떨어져도 그곳에 있는 나무 하나, 돌 하나에도 이름을 지어주고 관계를 맺는 것이 인간이다. 관계는 삶의 본질이다. 때문에 삶과 삶이 만나고 교차하는 결혼은 서로의 관계망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사건이다.
결혼은 서로의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한다. 만약,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싫어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반대로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내게 소개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어떤 경우든 그 결혼이 석연치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결혼을 생각한다면, 비록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관계망을 공유해야 하고 상대방은 그 관계망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존재는 DNA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배우자가 맺고 있는 관계 자체가 바로 ‘그 또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란 작품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결혼은 여기에 ‘관계’를 더한다. 결혼은 진정 어마 무시한 일이다.
'사이존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 등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사이'[間]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의 조직입니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인격이기도 합니다.
30년 동안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 '가족'이 된다. 고약해 보이는 낯선 할머니가 시어머니가 되고, 길에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청년이 도련님으로 변신한다. 무뚝뚝한 할아버지는 장인어른으로, 철없는 대학생이 처제가 된다. 나는 누군가의 사위가 되고 형부가 되고 이모부가 되고, 아내는 며느리도 되고 형수도 되고 숙모도 된다. 결혼은 어색한 명찰을 덕지덕지 붙이는 일이다.
'나'에 대한 기대역할도 다양해진다. 결혼 전에는 '아들'로서 살았다면, 결혼 후에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새 역할의 비중이 커지면 기존 역할과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고 하자. 아내가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 ‘아들’은 불편하다. 하지만 ‘남편’으로서는 공감할 수 있다. 아들과 남편으로서의 역할 사이에 긴장감이 돈다. 남편과 아빠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아이를 혼내는 장면을 보면서 ‘남편’으로서는 아내가 이해되면서도 ‘아빠’로서는 너무하다 싶을 때도 있다. 다양해진 관계와 역할 속에서 우리는 혼란스럽다.
결혼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한다. 아내와 자녀가 있음에도 ‘아들’로서만 살아가려는 사람은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남편과 아빠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고, 역할들 간의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들-남편-아빠의 역할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가족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조화롭게 역할을 운영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와 역할을 잘 조율하고 운영하는 과정이 곧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이다.
지금까지 관계론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존재론과 대비해 왔습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being)입니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입니다.
연애는 이성에 대한 본능적인 호감에서 시작한다. 호감은 상대를 더 알아가게 한다. '앎'을 통해 호감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 존경으로 성숙해 간다. 취준생 연인의 합격 소식에 함께 기뻐하고, 연인이 가진 상처와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린다. 그 시간이 깊은 애정을 만들고 관계의 아름다움을 가꾸어간다. 결혼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결혼이 요구하는 새로운 정체성은 나이를 먹는 것처럼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삼십 년간 쌓여온 경험과 인식의 틀을 깨는 '자기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결혼까지 이르게 한 서로에 대한 공감과 애정이 이 변화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부부가 쌓여 있는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둘 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 귀하게 자란 자녀들이다. 여전히 대우받으며 집에서 편히 쉬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배우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고단함을 뒤로할 줄 아는 사람이 '남편' 혹은 '아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다. 집안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절제하며 갓난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로서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가족에 대한, 관계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과 인내로부터 자기변화는 시작된다.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의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 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나를 위해 살던, 삶의 관성은 강력하다. 관성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 꾸준히 운동을 하고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한 부부, 건강한 가족 관계도 절제와 인내를 요구한다.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지독한 회사 스트레스 속에서도, 하루 종일 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얼마나 힘들었냐고, 오늘도 고마웠다'고 먼저 말할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기에 때로는 누가 더 힘든지 따지려 하고, 때로는 짜증과 스트레스에 이성을 놓아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완벽한 관계가 아니라 성숙한 관계가 중요하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결심과 노력이 성숙한 부부 관계를 만든다. 힘겹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기변화가 비로소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관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 입니다. 같은 키의 벼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개인의 행복한 삶은 행복한 관계로부터 온다. 실증적 연구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원만한 가족, 친구, 동료 관계가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즐거운 관계는 관계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노력이 만들어 간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행복한 관계의 바탕이다.
때문에 지금보다 더 나은 삶, 더 나은 관계를 꿈꾼다면 먼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는지, 나와 연결된 사람들도 함께 바라보고 있는지.
나와 연결된 삶들이 더 나아지기 바라는 그 마음에서부터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그리고 세상이 더 나아지기 시작한다.
인간적 공감이 바탕에 깔리지 않는 한 관계는 건설되지 못합니다. (중략)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서로를 따뜻하게 해 주는 관계, 깨닫게 해 주고 키워 주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입니다. (중략) 결혼을 앞둔 여인이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I really conceived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인간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답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