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자기만의 선명한 비전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가? 어떠한 좌절과 고난에도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위험하다. 진실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속 이야기가 하나의 단서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유용하다. 좌우를 살피지 않고 목표를 향해 무섭게 돌진하는 이들을 자기 파멸로부터 구원할 수 있고, 삶의 무질서와 세상에 대한 의심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불안과 우울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 전자는 책의 주인공(?) 격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자 생물학자)의 삶을 통해, 후자는 책의 저자인 룰루 밀러(과학 전문기자)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책의 구성이 참 독특하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삶을 다룬 전기물(Biography)이자 과학적 지식의 진보 과정을 다룬 역사책이며 저자 자신의 삶의 여정을 담은 에세이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내용을 긴밀하게 엮어 세계와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전한다.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과학자를 탐구하게 된 것은 그녀가 가진 다음과 같은 질문 때문이었다.
삶의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생물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조던은 수천, 수만의 어류들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여 분류했다. 대지진으로 자신의 큰 업적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은 순간에도, 가족을 잃고 헤어지는 슬픔의 순간에도 그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삶의 태도와 행적들에서 그녀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조던은 그녀의 답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열정 뒤에 숨겨진 자기기만과 자기 우월감이 드러났고 개인과 사회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다. 특히 생물 종의 우월함과 열등함을 구분하는 ‘우생학’에 열광했던 그는 빈곤과 질병, 범죄를 열등한 것으로 보았고 사회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부적합자들에 대한 불임수술을 합법화하고자 했다.
데이비드 조던이 평생을 집착했던 ‘어류’도 후대에는 어류가 진화적 분류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류는 인간의 직관이 만든 범주일 뿐 생물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엄밀한 과학적 분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데이비드 조던이 지치지 않고 달려왔던 삶의 결과물 상당 부분은 망상과 거짓, 폭력으로 연결된다.
저자는 데이비드 조던의 이야기를 통해 진보 즉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확신’이 아닌 ‘회의’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인생은 혼돈과 무질서 속에 있지만 우리는 실험과 반성을 통해 한 걸음씩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성찰하지 않는 확신과 열정은 오히려 거짓과 폭력을 확산시킨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 ruler 뒤에는 지배자 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를 거짓으로 옭아매고 있는 범주와 척도가 없는지 살펴보라. 희망은 절망의 범주 밖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