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Aug 31. 2018

선악과가 사라진 미래의 에덴동산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의문이다. 굳이 선악과를 만들어 죄를 짓게 하고, 인류의 질서에 혼란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창조주 본인의 뜻과 질서대로 세상을 움직인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나도 성경을 읽으며 한 번씩 떠올렸던 질문이다.



미래의 에덴동산, 이 곳의 구원자는 ‘포드’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작 <멋진 신세계>는 이런 불경스러운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간다. 그가 상상한 세계는 ‘미래의 에덴동산’ 이다. 대량생산 산업체계의 상징인 ‘포드’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한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손쉽게 채워주는 과학기술과 대량생산 시스템이다.

심지어 인간도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생산된다. 사회적 수요에 맞춰 인간을 부화시킨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육체적, 정신적 발달 수준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 인위적으로 인간의 계급을 조정하고 사회적 역할을 배분한다. 알파는 인간 부화(생산)장의 관리, 델타는 하수도 청소부 같은 식이다. 하지만 이런 계급 체계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 충분히 ‘학습’ 받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에덴동산에는 선악과가 없다. 모든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지 태어날 때부터 세뇌 당한다. 신세계의 용어로는 ‘습성 훈련’ 이다. 습성 훈련은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든다. 신세계의 윤리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한다. 자유의지가 아닌 선택된 의지가 주입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한다는 것-.” 국장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불가피한 사회적인 숙명을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만드는 훈련, 모든 습성 훈련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일상화된 쾌락


습성 훈련의 한 축이 ‘만족’ 이라면, 다른 한 축은 ‘쾌락’ 이다. 어릴 때부터 ‘프리 섹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경험한다. ‘인간의 몸은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결혼 제도를 부정하며, 출산의 과정도 부정한다. 섹스는 오로지 쾌락을 위해서만 가치 있는 행위다. 섹스와 사랑, 생명사이의 숭고함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소마’도 마찬가지다. 소마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채워주는 약이다. 우울감, 분노, 짜증, 슬픔이 밀려 올때 소마 한 알이면 충분하다. 일종의 마약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회 구성원이 매일 복용하고 있다. 일종의 행복 영양제 수준이다. 대신 소마는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인류는 행복한 기분과 생명중에 기분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무척이나 처량해 보이는군요! 당신 아무래도 소마 한 알이 필요하겠어요” 베니토는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를 뒤져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1세제곱 센티미터의 양이면 열 가지 침울한 기분이 물러가요...... 정말이라고요!”



불행할 수 없는 사회의 불행


아이러니한 것은 이 멋진 신세계가 철저히 개인의 행복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의식과 감정을 조작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대량생산한다. 사회에 불만을 가지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행복한 세상’ 불행하고 싶어도 불행할 수 없는 사회. 이 곳이야말로 에덴동산일까? 하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주체성과 존엄성을 훼손당한 인간이 어디까지 인간일 수 있을까. 기계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저자의 생각도 비슷했던 것 같다. ‘존’이라는 야만인을 소설에 투입시킨다. 야만인들은 ‘멋진 신세계’와 격리된 곳에서 살아간다. 야만인 사회 안에서 그의 삶은 엉망이었다. 만족과 쾌락보다는 고통과 눈물의 시간이 길었다. 그에게 이 곳은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환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글쎄요, 난 이곳에서 당신들이 누리는 그런 거짓된 가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불행해지고 싶은데요”


인위적으로 조작되며, 쾌락에 편향된 인간의 삶을 존은 역겨워했다. 그가 소설의 끝에서 선택한 미치광이 같은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흠없는 인간들보다 더 인간스러워 보이기는 한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자유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런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노예일 뿐이다.



행복한 삶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은 ‘행복’ 이다. 행복하고 싶어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그런다. 삶을 살다보면 행복이란 ‘현재의 즐거운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녀가 만나서 싸우고 다툴 때도 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서로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도 행복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들이 있지만 그 시간을 거쳐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이다.

삶의 긴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성장과 성취, 깊은 인간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감정적인 만족과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멋진 신세계’는 행복을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실은 행복한 삶의 재료가 된다. 고통과 눈물까지도.

인간의 삶에서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소마가 있는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불행의 요소들까지도 재료삼아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삶이다. 그것이 인간 삶이 가진 본연의 성격이며 인간의 잠재력이다. 사회는 구성원 각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로 충분하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는 80년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성 있는 미래로 느껴진다. 특히 인간이 가진 욕망과 쾌락에 대한 끝없는 탐심이 충분히 만들어날 수 있는 세상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기술적 구현도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을 신뢰하고 싶다. 인간의 자유는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옳은 일)을 선택할 때 더 빛난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 진정한 행복에 어긋나기 때문에 인간은 ‘멋진 신세계’를 거부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지점이다. 인류가 과연 미래의 과학기술 보여줄 ‘멋진 신세계’ 앞에 어떤 선택을 할 지 궁금하다. 왜인지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매거진의 이전글 창의적 조직을 만드는 커피타임의 비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