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교회가 온다> 송인수
최근 대통령 탄핵 사건을 통해 ‘교회’는 또 한번 우리 사회에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권력자의 잘못된 행동을 옹호하고, 법원의 판결을 부정하며 폭력 사태를 일으킨 세력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어느 ‘이상한 교회’의 예외적인 행태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수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는 그들이 말하는 이상한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사랑과 헌신보다 교회의 인적-물적 성장이 중요 가치가 되었다. 성도들은 삶의 불안을 잠재우며, 성공을 향한 기복적 소망을 안은 소비자로서 교회를 쇼핑한다. 성경의 가치보다는 내 입맛에 맞는 설교와 공동체가 우선이다. 교회가 정치-이익집단화 되는 것도 목회자의 야망과 고객의 니즈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물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기독교 생태계 안에서도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새로운 실험과 도전들이 있다. <평신도교회가 온다> 를 쓴 송인수 대표도 마찬가지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사회단체 대표로서 처음 그를 알았고, 그의 페이스북을 통해 평신도교회 운동을 접했다. 나도 기존 교회 모델에 대한 회의가 컸고, 대안적 교회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기에 평신도교회에 대해 궁금했다.
나는 ‘평신도교회’의 핵심 가치를 2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하나는 목회자 의존 신앙에서 그리스도 의존 신앙으로의 전환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타자지향적 신앙으로의 전환이다. 평신도교회는 단지 평신도들이 만들어가는 교회 운영의 모델이 아니라, 건강한 신앙과 교회에 대한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운동(movement)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평신도교회를 소개하기보다는, 건강한 교회에 대한 가치관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느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목회자는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가졌으며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평신도교회는 목회자가 아닌 그리스도에게만 의존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의존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일날 예배에 와서 은혜를 받으며 그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은 이미 그 ‘평신도-성직자(목회자)’ 틀에 갇힌 존재는 아닌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서 똑같은 성도이며, 세상을 향해서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으며 그리스도가 주시는 특별한 통찰과 은혜를 통해 말씀을 깨닫습니다. 또한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얻는 새 힘으로 우리의 싸움을 싸워 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싸움에서 알게 된 통찰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성장하고, 그 성장과 깨달음을 동료 신자들에게 나눔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도움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도움을 받는 일이 ‘의존적 수준’으로 악화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평신도교회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각기 맡은 역할이 다를 뿐이다. 목회자는 공동체의 리더로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만 의존하여 성숙한 신앙생활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해야한다.
목회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여러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는 모두가 교사가 될 수 없고 모두가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질서는 있어야 하니 누군가가 리더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신자 중에서 그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세워진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평신도와 구별되는 성직자 반열’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제가 없는 개신교 직제 속에서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자 대표요, 평신도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겠다면 ‘평신도들의 대표’인 셈입니다. 그 대표직에 전념해야 할 교회 내부의 필요 때문에 풀타임 직업의 특성을 띠게 된 것입니다.
목회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결론은 분명합니다. 신자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존재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충성하고, 진리에만 순종하며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자기 판단력과 감정, 나아가 영혼을 의탁하지 않도록 돕는 존재 말입니다.
그러니 목회자의 설교에 ‘아멘!’하고 외친다고 끝이 아니다. 또한 설교를 평가하거나 은혜받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은혜를 누리며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는 것은 온전히 성도 자신의 숙제이며, 목회자와 공동체의 도움을 얻을 뿐이다.
저자는 교회 안에 만연한 자본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자본주의 문화는 다름 아니라, 나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경쟁에서 승리하며 사는 삶이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자기중심적 인간상을 당연히 여기고, 그런 존재로 아이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키울 때 사회가 선택한 선생이 누구입니까? 아이들이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느냐는 말입니다. 학교 교사입니까? 부모입니까?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선생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자본주의가 우리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하는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너를 위해 소비하라’입니다. 너 자신에게 집중하고, 너를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일에 돈을 쓰라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노동하고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바로 ‘타자지향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의 고통에 응답하셨듯이,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고 그들의 신음소리에 응답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것이다.
구원자로서 예수님의 행동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바로 ‘나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이것을 소위 ‘타자지향성’이라 합니다. 그 타자지향성이 바로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삶, 바로 타자 지향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 이 나라에는 소위 전문가로 인정받는 사람들, 대단한 권력자로 추앙받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이 나라의 고통받는 민중과 시민들, 입시 경쟁의 귀신에 휘둘려 오랜 세월 아파하고 신음하는 사람들 곁에 선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다 아는 누군가는 출세의 절정까지 갔지만, 사마리아 성의 고통받는 환자들 같은 아이들, 입시 경쟁의 귀신에 휘둘려 자기 인생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아이들을 고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신자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신자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 안전과 이익의 울타리를 넓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 좁은 자아의 그릇을 깨버리고 주님의 큰 그릇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이 땅에서 성공하며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국가는 삶은 신앙생활이 아닌 기복생활일 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청하신 삶은, 당신이 우리를 살린 것같이 사람을 살리는 삶이었다.
<평신도교회가 온다>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책이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에 의존하는 교회, 세상의 욕망을 따라가는 교회의 모순과 타락 속에서 우리는 예수를 따라사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 책은 다시 한번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무너져가는 현실 교회에 대한 절망을 멈추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평신도교회는 목회자가 없어도 교회가 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아니, 목회자도 평신도에 다름이 아니라는 선포요, 평신도 바깥의 누군가가 있어 그를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는 것은 초대교회 정신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좋은 설교를 찾아 교회를 쇼핑하는 것을 멈추고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교회를 이루라는 촉구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의 핵심은 목회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말씀을 의지해 믿음 가운데 살며 세상의 고통을 해소하는 일에 동참하는 이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곳이라면 모두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