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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Jan 07. 2019

창조와 진화의 이분법 너머

과학과 신앙의 공존에 대해 영감을 준 책들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교회가 보여주는 ‘과학’에 대한 불신이다. 학창시절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믿음의 선택을 강요받던 시기도 있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거부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범인것처럼 여겨졌다. 창조도 진화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박쥐처럼 이리저리 붙어 다녔다.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떠날 수 없었던 나는 어느 순간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해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있어야 하는 일이 쉽지 만은 않았다.

하나님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하시는 분이 맞다. 그 모든 질서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과정에서 과학을 초월하는 많은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예수님의 하나님됨을 증거하기 위한 사건이지, 자연의 질서를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자연에 보편적 질서를 부여하셨고 인간에겐 그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을 허락하셨다. 우리에게 이성이 없었다면 성경도, 신학도, 기독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성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나는 몇 년 전 한 권의 책을 읽고서 삼십년 이상 묵혔던 가슴의 체증이 속 시원히 내려감을 느꼈다. 창조론과 (지구가 육천년 전에 탄생했다고 주장하는)창조과학이 다르며,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면서도 생명체의 진화를 인정할 수 있다는 책의 메시지는 나를 금세 사로잡았다. 서울대 우종학 교수는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IVP)라는 책을 통해 많은 크리스천들이 고민하고 갈등했을 과학에 대한 입장을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갈등 앞에서 늘 불편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신앙과 과학이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 안의 과학이 구원 받았다! 제작년에는 <창조론 연대기>(김민석 저/새물결플러스)라는 크리스천 교육(?) 만화가 출간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서도 창조론이 가진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국내에 알려진 창조과학은 창조론의 다양한 관점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한편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왜 한국교회는 그 동안 눈과 귀를 닫고 그들만의 세상에서 승리자 노릇을 하고 있었을까.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는 높아만 가는데 교회는 과거의 지식 속에 갇혀 인간과 세상에 대한 무지함만을 쌓아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의 지성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교회가 영성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강조한 반면 지성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과학을 잘 아는 것과 구원 받는 것 사이에 큰 관련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다. 하지만 지성을 간과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더 알아가는 일을 가로 막는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점이다. 창조과학에 대한 맹신이 사람들에게 반지성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교회라는 집단 자체에 등을 돌리게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과학과 진지한 대화를 시작해야 할 때다.

과학은 결코 신앙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적 영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작년 <마음의 미래>(미치오 카쿠 저/박병철 역/김영사) 라는 책을 읽었다. 뇌와 의식, 마음에 관한 현대의 이론과 연구결과들을 폭넓게 해설해준다. 인공지능 기술, 뇌 과학의 발달이 기존에 없던 신인류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과 뇌는 여전히 미지와 신비의 영역이다. 뇌 속의 뉴런은 천억개가 넘으며 이는 은하수 안에 있는 별의 개수와 맞먹는다고 한다. 하나의 뉴런은 수만개의 이웃 뉴런들과 연결되어 있어 연결부위만 해도 경이로운 숫자이며 과학자들은 이 숫자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선컴퓨터의 창업자 중 한 사람인 빌 조이(Bill Joy)는 첨단기술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유토피아(이상향)는 좋은 사회와 좋은 삶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좋은 삶을 누리려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술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는 병에 걸리지 않고, 죽지 않고, 시력이 좋아지고, 똑똑해지는 것이 전부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이런 곳이 낙원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무나 기가 막혀 웃지도 못할 것이다.”


첨단기술이 인간의 물질적 영역의 진보를 가져올 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영적인 영역의 진보를 가져올 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존재이다. 과학의 진보가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미치오 카쿠가 ‘인류에게 호의적인 우주’에 대해, 인간 존재의 경이로움에 대해 남긴 이야기가 그렇다. 그의 메시지를 읽고 있자면 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껴진다.


인류원리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우주는 생명체에 호의적이다.” 언뜻 듣기에는 별 내용 아닌 것 같지만, 그 저변에는 매우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신기하게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은 생명이 탄생하고 살아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세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우주는 우리가 이 세상에 등장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뇌에 관하여 많이 알게 될수록 더욱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아는 한 뇌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복잡한 물체이다. 데이비드 이글먼 박사는 말한다. “뇌는 자연이 창조한 경이로운 걸작이다. 그리고 두뇌분석 기술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면서 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는 정말로 운 좋은 사람들이다. 뇌는 우리가 우주에서 발견한 것 중 가장 경이로운 구조물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뇌를 많이 알수록 신비감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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