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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Aug 15. 2019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아


벌써 세 번째다. 요즘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데 아내의 피드백이 부정적이다. 몇 번을 고쳐 써도 나아지지 않는다. 작년 독립출판을 준비하며 글을 쓸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내는 늘 독자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평가를 해주었는데 한 두 번 수정하면 개선이 되곤 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답답한 마음에 글쓰기 책을 읽어보려던 차였다. 글쓰기 수업을 하는 ‘은유’ 작가에 대한 글을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사람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메모 어플에 짧게 기록해두었다. 얼마 후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있던 차에 잘되었다 싶었다.


이 책은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증언이다. 누군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여지없이 맞닥뜨리는 문제들, 고민들, 실험들, 깨침들, 변화들, 질문들에 관한 이야기다. 글을 쓰고 싶은데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할 때, '왜'라고 묻고 '느낌'으로 써 내려가는 그 섬세한 몸부림의 시간을 담았다.



본인의 글쓰기 수업 경험을 집약하여 글쓰기에 대한 농익은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책을 읽을수록 책이 나를 읽기 시작했다. 책은 내 안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과 갈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 글을 쓰면서 어떤 쾌락을 누리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며 내 어깨를 토닥이듯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따라 내 욕망의 심연으로 들어갔고 심연 속에 실타래처럼 얽혀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작년 여름부터 책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독립출판 워크숍에도 참여하여 책을 제작하는 과정을 배우며 원고를 썼다. 책의 제목은 ‘서른아홉 행복가능보고서’. 삼십 대 후반, 인생의 힘겨웠던 시기를 보내며 경험하고 고민했던 이야기를 담았다. 연애와 결혼, 직장생활, 인생의 새로운 꿈에 대해서까지.

나는 왜 이 글을 쓴 것일까. 답이 있다면 하나다. ‘쓰고 싶어서’. 다른 이유는 없다. 언어를 통해 내가 힘들었던 시간을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왜 들었을까.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글쓰기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공업으로,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다. 자기 안에 솟구치는 그것에 대해 알아채는 감각, 자기 욕망과 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감성적 역량, 세상을 읽어나가는 지식과 시선을 갖춰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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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이는 알고 있는 듯도 하다. 글쓰기에 삶의 속도를 늦추는 요철 기능이 있고 삶의 방향을 이끄는 안내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질문을 주고받으며 잠시 호흡을 고를 수 있다. 이미 축복.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낫이 아니라 낫질이다.


글쓰기가 치유의 행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적어도 나의 경험에만 비추어보면 그 말은 진실이다. 나의 경험, 생각, 느낌이 적나라하게 쓰인 글이 나를 위로하고 치유한다. 치유와 구원의 순간은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이해되고 공감받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의 느낌을 정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묘사하는 행위는, 완벽하게 나를 이해하는 타인을 빚어내는 일이다.

아마도 내가 ‘쓰고 싶었던’ 이유도 글 쓰는 행위가 가진 그 미지의 힘에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글은 왜 써지지 않는가?


독립출판은 내 몸과 마음에 청량감을 불어넣어준 즐거운 경험이었다. 얼마만인지 모른다. 가족도 회사도 아닌 오직 ‘나’를 위해 모든 감각을 집중하는 시간. 김 빠진 일상에 부어진 탄산수 같은 경험이었고 내게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책을 쓰고 펀딩으로 책을 판매하고 독자들의 피드백을 받는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흥분된 순간이기도 했다.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공감과 위로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독립출판 프로젝트가 끝난 후 흥분은 일상의 중력에 끌려 땅으로 내려왔다. 정식 출판도 해보고 싶어 많은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받지 못했다.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름 작가라며 사람들에게 으쓱대었던 일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두 번째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급하게 대략의 목차를 정리해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먹힐 것 같’단다. 이번에는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람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에피소드를 강화하고 극적인 요소들을 넣어 몇 편의 글을 썼다.

하지만 아내로부터 빠꾸만 맞았다. 억지스럽다고 했다. 사실은 나도 내 글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속이 후련한 느낌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강력한 적을 만났다.




#글을 쓰다, 나를 쓰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는 동안 힌트를 발견했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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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두툼한 책이든 한 페이지 글이든 한 출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글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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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보편적 관점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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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사실 글을 쓰면서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재밌게 써보자는 욕심에 새로운 시도들을 하다 보니 정작 ‘나’의 생각과 느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말이 왜 하고 싶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니 글쓰기가 그저 기술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 나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행위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글을 쓰고 나서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다시 책상에 앉았다. 내 마음 안에 실타래처럼 얽힌 욕망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며 ‘나’에게만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내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왜’ 그 메시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간의 경험과 생각, 느낌에 집중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의외로 글을 빨리 써 내려갔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한 편의 글을 아내에게 보여줬다.

‘이번엔 좀 괜찮네. 재밌어’


#최전선에서 만난 글쓰기 체크리스트


책을 읽으면서 나름의 글쓰기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글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고 공감 가능한 방식으로 전하고 싶어서다. 항목은 아래 다섯 가지. 혹시 당신도 지금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섯 가지 질문 앞에 정직하게 답해보면 어떨까.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무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1.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가?
2. 내 삶의 장면을 나만의 관점으로 관찰하고 해석하였는가?
3. 나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고 밀도 있게 표현하였는가?
4.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는가?
5.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아니면 교훈을 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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