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서는 생각보다 얇다.
종이 한 장.
접으면 가방 안에서
영수증만큼 존재감이 사라지는 두께였다.
의사는 친절했고, 설명은 정확했다.
수치와 가능성과 향후 계획이 차례로 등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질문도 몇 개 했다.
이 장면은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중요한 순간’에 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가장 또렷이 남은 기억은 그것이 아니다.
병원을 나서자 자동문이 열리며 바깥공기가 밀려왔다.
약간 차가운 바람, 신호등 소리,
그리고 병원 앞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아, 배고프다.
아픈 사람에게도 배고픔은 온다.
이건 진단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사실이다.
가방 속에서 종이가 스쳤다.
접힌 진단서였다.
내 몸에 대해 많은 걸 말해주는 문서였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표정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 없어 보였다.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잠깐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각자의 속도로 걷는 사람들.
누군가는 전화를 받았고,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그들 중 누구도 내 가방 속 얇은 종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세상은 내가 아픈 걸 모른 채
평소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카페에서 어떤 음료를 주문할지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내가 이런 사소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병이 내 삶을 한 번에 덮어버리지는 못했구나.
진단서는 나에게 새로운 단어들을 알려주었지만,
오늘 내가 무엇을 먹고 어떤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삶은 늘 그런 방식일 것이다.
중요하다고 불리는 순간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장면들 속에서 계속된다.
진단서 바깥에는 여전히 하루가 있다.
그 하루는 느리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하고,
생각보다 잘 웃기도 한다.
오늘의 나는 아픈 사람인 동시에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이고,
신호등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사람이며,
빵 냄새에 마음이 잠시 풀어지는 사람이다.
진단서는 내 몸을 설명했지만,
그날 내가 어떤 노을을 봤는지는
끝내 적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장면들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진단서 바깥에는 여전히 하루가 있고,
그 하루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이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