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에 숨을 불어넣는 자

by 소원상자

활자는 조용하다

납으로 찍히든
잉크로 눌리든
그것들은 종이 위에 누워 있는
작은 뼈들에 가깝다

ㄱ은 무릎을 세운 뼈
ㅁ은 사각의 방 하나
ㅅ은 바람을 받는 갈비뼈 같다

그저 모양일 뿐이다
숨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떤 손이 다가온다
활자를 읽는 손
혹은 쓰는 손

그 손이 문장을 세우는 순간
눕던 활자들이 일어나
미세하게 맥이 돈다

한 글자는 눈이 되고
한 문장은 걸음이 되고
어떤 문단은
사람 한 명의 생애처럼
천천히 숨을 쉰다

활자에 숨을 불어넣는 일은
새 언어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 흩어진 말들 속에서
아직 식지 않은 맥박을
찾아내는 일

그는 글자를 고른다
의사가 맥을 짚듯
단어 하나를 들어 올려
잠시 귀를 기울인다

이 말은 아직 살아 있는가
이 문장은 아직 걸을 수 있는가

죽은 문장은
화려하게 꾸며도
금세 드러난다

살아 있는 문장은
가난한 옷을 입어도
멀리 걸어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대장장이보다 느리고
정원사보다 오래 기다린다

문장은 때때로
씨앗처럼 늦게 자란다

하루를 묵히고
계절 하나를 건너
어느 날 갑자기
단어 하나가 숨을 쉰다

그때 비로소
활자들은 종이 위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독자의 눈 속으로 들어가
다시 숨을 쉰다

좋은 문장은
종이 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살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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