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탈출기
1억, 2억, 3억,
처음에는 악 소리가 났으나,
이내 익숙해져 어딜 가든 억억 잘도 말하곤 했다.
자꾸 말하다보니 1억 정도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돈을 마련할 길을 궁리하기 시작하니
그건 그야말로 엄청난 돈!
아아, 생각만해도 머리가 지끈지끈거리지만 그건 뒷날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억 소리에 익숙해지는 나날,
나는 지금 집을 구하러 다니는 중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서울시 강북구 미아동.
10년째 살고 있지만 이곳은 아직도 차가운 도시.
그 넓은 서울에서도 왜 이곳에 이리 오래 머물렀을까.
첫번째 직장이 혜화였던지라 근처 방을 구하러 다니다보니
제일 저렴했던 곳이 이곳 미아사거리에 있었다.
피터팬 직거래
미아사거리 역 도보 10분
(여러군데를 다녀본 결과 도보 측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정말 역 주변 - 도보 3분,
나올때가 지났는데.. 불안감이 스며드는 거리 - 도보 5분,
아아, 나는 지금 운동 중입니다 - 도보 10분)
방 1칸, 화장실, 주방, 전세 1500만원,
사용하던 가구와 침대, 냉장고도 모두 드립니다.
오호라, 통재라,
그렇게 우연히 머물렀다가 그만
익숙해져버려 눌러앉아버렸다.
이 동네를 10년이나 살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보면 굴복해버리고 만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렴한 전세집에,
가난한 형편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왔을 때
옆집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살고 계셨다.
어느날 갑자기 병원에 실려가신 할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방은 비어있었다.
빈 옆집과 벽을 맞댄 방에서 잠을 자며
그런 예감을 하곤 했다.
나도 결국 늙으면 이 반지하에서
어느날 갑자기,
혼자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런 밤은, 어쩐지 무서워져
옆에서 자는 고양이를 꼭 껴안곤 했다.
물론 고양이는 금방 도망가버렸지만.
옆집에는 할머니 한 분이 새로 들어오셨다.
일주일에 세번씩 할머니는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오신다.
옆집에 다른 누군가 살기 시작했음에도
한번 든 예감은 깊숙한 곳에 꽈리를 틀고 있었다.
혼자 죽는 건 두렵지 않다.
그보다 정말 불안했던 건 이런 것이었다.
이 반지하에서 햇볕 한번 보지 못한 채 평생 살다 죽는거 아닐까.
그럴만도,
부산에서 상경해 자취를 시작한 23살부터 36살인 지금까지
줄곧 반지하 단칸방에서만 살아왔다.
아아, 13년이라니.
네 번을 옮겼지만 늘,
반지하에서 머물렀다.
햇볕을 오랫동안 받지 못한 나는
하얗고 투명한 피부톤을 얻었고,
습기가 가시지 않는 방에서
만성비염을 얻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저렴한 방에
나름대로 잘 살아오며 만족해왔다.
내 수준에 방 한칸도 있고, 빚도 없으면 좋은거지.
그렇게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어쩐지 억울하기만 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볕에 잠이 깨고,
햇볕을 받으며 잘 자라나는 식물도 키워보고,
뽀송뽀송 햇볕에 말린 빨래 냄새도 맡아보는 것,
쭈그려 앉아 씻는 화장실이 아닌
세면대 달린 화장실에서 서서 세수도 해보고,
쓸만한 주방이 있어서 집에서 요리도 해보는 것,
그런 건 내게는 사치스러운 일일까.
어차피 반지하에서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은 햇볕 드는 집의 기억을 품어보자는 마음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들었다.
그날부터 나는,
쉬는 날마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