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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섬 May 17. 2016

'나는'으로 시작하는

이곳에는 무엇을 써야 하는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 싶어 하는지도, '왜'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줄곧 한다. 내심 무용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이 몇 줄을 쓰기 위해 들이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으흠. 쓸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까지 더한다면, 에휴, 한숨이 나온다. 예전 ㅍㅍㅅㅅ 기사를 보다 빵 터졌던 한 줄을 기억한다. '나무늘보'라는 기자는 자기소개에 이렇게 써놓았다. '여러분이 성의 없다 욕하는 이 글은 7시간 동안 작성한 기사입니다', 내게는 최고의 웃픈 문장이었다.

그런 무용함에 시달리면서도  써야 한다는 건 이상하게도 마치 어떤 의무 같기도 하고, 지독한 부채 같기도 하다. 쓰지 않고 하루를 보내면 5% 복리 금리라도 붙은 양 다음날은 부채감이 더 무거워져있다. 왜 이런 데 시달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열심히 써도 무용할 뿐인데, 이럴 때면 그 기계에다 넣고 이유를 만들기라도 하고 싶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에 보면 기가 막힌 발명품이 하나 나오는데, 어떤 황당한 결심이나 결론을 말하더라도 합당한 논리를 만들어준다는 발명품이었다.(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작품을 좋아하더라도 이 작품은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적어도 내게는 전혀 재미가 없었어요) '글을 써야한다'라고 입력하면 그럴싸한 논리적인 이유를 기계가 만들어준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가 나를 설득시키고 남들에게도 설명하기 편하니, 읽으면서 그 발명품이 탐이 났었다. 거꾸로 말한다면 이유야 같다 붙이기 나름이다. 그러니 명제는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블로그에다 읽은 책의 문장들을 옮겨볼까, 독후감이라도 써볼까, 애초에는 그런 계획이었는데 이 양반 강의와 책을 읽은 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이강룡이라는 번역자 말이다. 벙커에서 했던 '이강룡의 글쓰기 특강과 번역 신공 강의는 젠장, 정말 좋다. 글쓰기에 대한 자세를 진지하고 무겁게 만든다, 빌어먹게도. 이강룡의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라는 책까지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번역을 위한 조언들도 있지만 글쓰기에 관한 주옥같은 말들이 오히려 가득하다. 세 번을 듣고 한번 읽었지만 나는 앞으로도 종종 듣고 읽을 것이다. 조만간 또 잊고 말 테고, 그때마다 되새겨야 할 말들이기 때문이다.
http://www.podbbang.com/ch/5478?e=21843747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저자 이강룡

출판 유유

발매 2014.03.04.



'글에 시간과 노고를 담아라,  근거가 단단한 글을 쓰고, 훌륭함을 위해 귀찮고 불편함을 견뎌라. 나아가 말과 글과 삶이 일치하도록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기쁨을 누려라.'
이 말들은 들으면서 감탄을 자아나게 하는데 막상 무언가를 쓰게 할 때는 어깨를 무겁게 한다. 그가 한 말 중 정확하게 인용하라는 말 때문에 나는 위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기 위해 글쓰기를 중단하고 오랫동안 정확한 문장을 찾기 위해 시간을 소비했다. 애덤스 작품에서도 어떤 발명품인지를 찾기 위해 한참을 검색했는데 이건 찾지 못했다. 다음에 책을 뒤져서 수정해놓아야 하겠지. 이런 식으로 문장을 완성하는데 부담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고생을 해서 정확하게 쓰고 나면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훌륭한 말들을 듣고 말았으니 그런 글을 지향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 지향점을 바라보다 보면 글쓰기란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와도 맞닿아있다.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건 그만큼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관한 책에서는 '나는'이란 말을 생략하는 게 좋다고들 한다. 빼는 것이 더 잘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강룡의 글과 말을 듣고 난 후 '나는'이란 주어를 즐겨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이의 문장을 옮기는 것도 자제하곤 한다. 
어쩌면 가장 정직한 문장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이란 생각도 한다. '나는'이란 말로 시작하는 문장은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다. 읽고 듣는 것도 '나는'이란 말을 거치면서 내 필터를 거친 '내' 문장이 된다. 결국 나라는 인간은 '나는'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정직함과 고유함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내가 보고 듣고 겪는 것들은 내 육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가진 미약한 범위, 그것이 내 한계임을 매번 자각하면서 내 문장이 닿는 거리를 조절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이건 나라는 개인이 생각하고 겪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는 한계를 '나는'이란 주어는 담고 있다. 나는 그 한계를 늘 생각해야 한다.  
한동안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많이 쓰려 한다. 또한 삶과 이어지는 글을 쓰면서 더 나답게 살고 싶어 하는 몸부림을 계속하려 한다. 시간과 노고를 많이 들여 겨우 이런 걸 하려 하나, 그 무용감과 매번 싸우겠지만 내 꼬라지를 생각하면 그런 건 금방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지. 나는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남은 날들을 잘 살기 위해 노력이라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닿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건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현명한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의 말에서 알 수 있긴 하지만


나이가 들면 느는 게 삶의 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노인은 삶의 지혜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도 그런 미덕이 찾아오리라고 기대했고, 내심 그런 미덕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물론 그가 기대하는 미덕은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였다.
그런데 또다시 걸려들고 만 거야. 
빌어먹을! 도대체 이번에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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