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역이 결정되었다.

나는 햄릿 5(멀티 5)다.

by 이슬노트

지난주 수요일에 우리 연극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이 출연하는 연극 '퉁소소리 '를 보고 왔다.


퉁소소리는 한 부부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애틋함을 잃지 않으며 살아온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다.

약 20명 정도의 배우들이 무대를 쉴 새 없이 꽉 채운 연극이었다. 주인공을 맡아 극을 이끌어 간 배우들 뿐 아니라 여러 역할을 하며 극의 재미요소를 더한 감초들이 인상 깊은 연극이기도 했다.

우리의 연극이 이렇게 돌아가겠구나. 주인공을 비롯한 대사가 주를 이루며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주요 배역, 그리고 대사분량은 적지만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극의 분위기를 돋우는 감초 같은 역. 어쩐지 나는 이 감초 같은 배역을 맡게 될 것을 예상이나 한 듯, 퉁소소리를 보는 내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마을 주민으로, 소품을 옮기는 역할로, 짧은 대사를 인상 깊게 내뱉는 신스틸러 배우들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 더 눈길이 갔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캐스팅발표날.

몸풀기 시간에는 6, 7세쯔음 내가 어떠했나를 생각하며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사실 6,7 세즈음의 나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주로 놀았던 것 같다. 워낙 조용했던 언니와 함께 집에서 인형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 그때즈음의 나를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도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어서 그냥 팔을 흔들며 걸어 다녔다.

E성향을 가진 시민배우님들은 술래잡기하듯 뛰어다니기도 하고, 발레 동작도 하며, 바닥에 몸을 내던지며 미끄러지기도 했다. 연극은 그런 요소가 많은 것 같다. 웃기는데 또 진지하다.


책상을 옮기고 자리에 앉아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는 9시 30분에 배역발표한다고 했지만, 이름을 부르며, 그 배역을 읽어보라고 주문을 했다. 결국 그게 맡게 된 배역임을 우리는 알 수 있었지만, 김신기 선생님은 굳이 계속 배역발표는 9시 30분에 할 거라고 하셔서 옆에 보조 선생님은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었다. 9시 30분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캐스팅발표는 역시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우리 연극에는 멀티 역할을 하는 배역을 햄릿들이라고 부른다. 햄릿 2~8까지가 햄릿들이다. 극 중 극을 하는 햄릿 속의 연극배우들이고, 백성들, 유령들 등 이것저것을 하게 되는 역할이다. 나는 햄릿 5 역할이고, 극 중 극에서는 왕비역이다.

오디션에 왕비역으로 도전했다. 폴로니우스는 사실 자신이 없었고, 오필리어는 내 나이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오디션영상으로 햄릿들을 하기엔 대사들이 너무 짧았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결국, 극중극에서 왕비를 하니까 반은 성공한 셈으로 봐야 하는 걸까.?

대사는 정말 짧다. 외울 게 없어서 좋기는 한데, 대본리딩을 해보며 연극이 재미있다고 느꼈던 나는 사실 서운한 마음도 올라왔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연극에서는 모든 배역이 다 소중하니까, 내 역할이 하찮다고 여기지 말고, 연습을 하다 보면, 재미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 내가 맡은 역할의 대사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햄릿들이 공연준비를 하는 씬에서 햄릿 5는 약간 바보 같기도 하고, 의미 없는 대사를 내뱉는데, 이것이 웃기기 위한 장치인 것 같지만 전혀 웃기지가 않아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 역할은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 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넣은 역할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갑자기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오고야 말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 연출자의 의도가 있겠지라며 잊어버리려 했지만 이런 상황이 늘 주변인에 머물러 있는 내 모습 같아서 속상했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옵션이다.

하나는, 작은 역할을 인상적으로 남길 신스틸러가 되기 위해 그 장면을 조금 바꿀 노력을 해보는 것.

또 하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이 역할을 그냥 나 자신을 위해서 그저 준비하는 과정자체만을 즐기는 것.

또 하나는, 이 불편한 감정을 없앨 수 없다면, 시민연극을 그만두는 것.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내가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시민연극에 지원을 했던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를 찾고 싶었고, 나를 깨고 싶었다.

늘 당당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되찾고 싶었다. 연극을 통해서라면, 나를 답답하게 둘러싸고 있는 이 막을 조금은 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단은 끝까지 해봐야겠다.

지금 그만두는 것은 이 연극에 참여하고 싶었던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는 꼴이고, 연습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얻고 싶었던 그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하다 보면, 불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내 역할이 소중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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