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들 첫 연습

햄릿5의 정체를 밝혀라.

by 이슬노트

긴 명절이 지나고.

간간히 떠오르는 햄릿5 역할에 대한 생각을 하면, 복잡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아예 잊어버리려 애썼다.

배역이 정해지고, 연습시간이 빠듯하여 10월에는 매주 일요일에도 모여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

명절연휴가 끝난 일요일.

어쩐지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끌고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예정 시간보다 10분정도 늦게 갔더니, 다른 햄릿들과 선생님이 와 계셨다.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햄릿5의 정체가 무엇이냐 여쭈었다.

설정하기 나름이라고, 재미있게 만들면 된다고 하셨지만, 이 엉뚱하고 바보같은 대사를 과연 잘 살릴 수 있을지 여전히 고민이 되었고, 이 하찮은 역할에 관심을 두고 고민하는 이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겠다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햄릿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햄릿들은 역할의 이미지가 비교적 확실하고, 단독샷을 받을만한 대사도 있다. 내게는 그런 장면이 없으니, 안그래도 하찮은 대사의 하찮은 역할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깊게 박히고 있었다.

그만둔다고 얘기하지 않는 이상, 이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언제쯤 얘기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들랑말랑할 무렵, 난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다 함께 하면 재미있고 멋있을 수는 있겠다. 햄릿들이 하는 난타장면에 쓸 음악얘기를 나누다가 저작권 문제로 AI를 활용하여 음악을 만들기로 했다. 햄릿들이 등장하는 씬은 총 16씬 중에 9씬이라고 하니, 공연의 절반 이상을 무대에 있는 셈이다. 햄릿들은 유령역할도 하고, 또 중간에 시체처럼 움직이는 장면도 있다. 그래서 햄릿들을 담당하는 선생님께서 좀비 움직임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상태에서 발을 삼각형으로 모으고, 무릎을 살짝 굽히고, 한쪽 어깨를 내리고 엉덩이는 나오지 않게 허리는 빳빳하게 편 상태로 발을 질질 끌면서 터벅터벅 걸어가기.. 설명대로 했더니, 너무 잘한다는 칭찬이 나왔다.

이런! 여기서 재능발견이라니!... 모두가 인정하는 좀비 연기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나오는 장면들에 대한 설명을 쭉 듣고,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도 하면서 걱정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내가 나오는 장면을 리딩해보기 시작했다. 템포가 빠르면 좋겠다고 해서, 함께 하는 다른 햄릿들이 빠르게 대사를 치고 나가고, 중간중간 내가 또 그 대사를 빠르게 받아 치니 조금은 나아보였다. 뒤로 갈수록 사알짝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관객들이 재미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햄릿이라는 무거운 연극 속에 유일하게 코믹한 장면인데, 이왕에 할거면 정말 웃기게 하고 싶고, 그렇지 않을거라면 안하고 싶다.

뒤에 극중 극의 왕비로 출연하는 장면도 리딩해보고 전체적인 극의 흐름과 방향을 조금이나마 인지한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정규수업날이다.

바쁜 나의 일상을 보내는 동안 연극을 잊어버렸는데, 다시 고민의 시간이 돌아왔다.

전체 리딩을 했다. 몇몇 분이 나오지 못해, 다른 분들이 대역을 하고, 중간 중간 김신기 선생님께서 여러 코멘트를 해주셨다. 대사가 많은 주요배역들은 각 장면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 게 좋을지, 여러 주문을 받았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대사가 적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일하고, 집에서도 일하고, 야외출사를 포함한 사진수업에, 사진전 준비에, 연극준비까지...지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한다면, 햄릿5는 내게 선물같은 역할인지도 모른다.

예상한 바와 같이 내가 고민했던 장면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만들어보라는 얘기만 하실 뿐 별다른 얘기가 없으셨다. 내 역할에 대한 고민은 역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대사보다는 몸연기가 필요한 역할이라 머리속으로만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보았지만, 여전히 두루뭉술하다. 이 바보같은 햄릿5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여전히 걱정이고,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난 왜 이리 자꾸 회피하려고 하는 걸까.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고민에 대한 답이 금방 나오지 않을 때 나는 자꾸 피하려 한다. 어쩌면 그래서 너무 어려운 도전을 늘 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의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이번 햄릿5를 잘 해내고 나면, 이런 내가 좀 나아질까.


나 홀로 어두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빼고 다들 먼저 가버렸다. 뒤늦게라도 쫒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두운 언덕을 올라가자, 환한 건물이 나타났다. 연습장소로 가던 길에 나무 아래서 연습을 하는 유명배우를 만났다. 내게 어찌나 아는 척을 하는지, 내 공연에 와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앞서 만난 배우와 어디론가 길을 가는데, 또 다른 배우를 만났다. 이 배우 역시 내 공연에 와준다고 한다. 두 배우가 무대에 올라 인사할 생각을 하니 나는 나 스스로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나는 두 배우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눈을 뜨니 아침이다. 이틀이나 연극연습을 해서인가....꿈에서까지 연극이 나올줄이야.

안타깝게도 두 유명배우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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