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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미상 Mar 17. 2020

그대가 세상을 속일지라도

웰컴 투 더 레고 월드




필연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살다 보면 겪게 되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고 나면, 으레 세상이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강한 통증을 감지하면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엔돌핀을 분비하듯이, 모든 것과 내가 멀어진 그 순간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자신을 감싸 안는 유일한 내 편이 오직 자기 방어기제뿐인 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뿐인 다이아몬드인 줄만 알았던 영원의 약속이 싸구려 유리 파편이 되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로 산산이 눈 앞에 흩어졌을 때, 나는 세상이 나를 속였다는 배신감에 처절히 무너졌고 온 힘을 다해 분개했다. 사람이 충격을 과하게 받으면 그 어떤 실낱같은 감정표현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내 몸은 입력어가 잘못되어 크게 고장 난 기계처럼, 심각하게 떨고 떠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누군가 시간을 정지시키고 내 어깨를 단단히 부여잡고 이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과연 머뭇대지 않을 자신이 있었을까. 뜨거운 선혈처럼 뿜어 나오는 자기 방어기제를 잠시나마 멎게 할 수 있었다면, 독한 진통제 한 알처럼 작은 냉정이라도 삼켜낼 힘이 만약 그 순간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저주에 가까운 대답을 세상에 내뱉을 수 있었을까. 아마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는 무언의 대답을 하는 것으로 찢어발겨진 자존심의 파편이라도 지키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만약 그 순간에, 만약 누군가가

내 눈을 정면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너 이렇게 될 것을, 정말로, 정말로 몰랐느냐'라고 차분히 물었다면 말이다.






길을 찾을 때, 누구도 내비게이션 속에 직접 들어가 VR 안경을 쓰고 지금의 골목길부터 탐색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 보다 쉬운 방법은 당연히 내가 서 있는 지점과 목표지점을 한눈에 보는 것이다. 그게 가장 안전하고 정확하기에. 문제는 그게 참 어렵다는 데에 있다. 당장의 한 걸음이 무겁고 힘겨울수록 더 그렇다. 인생이 필요 이상으로 피곤해지면, 갑자기 시야엔 온갖 것들이 확대되어 크게만 들어온다.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이 폭풍 같은 의미 대생산을 시작하고, 가장 넓고 안전한 길을 지도상에서 없던 것처럼 뻔뻔하게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뿐인가, 인생의 이 지점까지 잘도 스스로 운전해 와 놓고선 갑자기 마치 운전면허조차 구경해본 적 없는 사람인양 굴기도 한다. 그 지점 즈음이 내가 세상을 속이기 시작한 지점이었다는 것을, 그 순간엔 나조차도 깨닫지 못한다. 들어선 그 길이 꽃길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홀린 듯이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들어서는 것이다. 지금 나를 찢어놓는 이 가시밭길에 언젠가 내 피를 닮은 붉은 꽃이 선연히 피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결국엔 어느 정도 결과론적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만큼 벗어나 다시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돌아보니 세상'만' 나를 속인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분명히 나 또한 세상을 속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를 향해 세상이 던졌던 수많은 경고들을 무시하며 그것도 꽤나 열심히, 그리고 꽤나 어이없게. 아직 괜찮다고, 이 정도는 괜찮은 거라고. 더 참을 수 있다고, 참아내야 하는 거라고. 내가 이해심이 좁은 사람인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고, 사랑이라면 이것보다 더 한 것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이 길고 외로운 터널 끝에, 우리를 행복하게 할 낙원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시간이 지난 후 내비게이션 검색창에 찍혀 있던 것이 낙원이 아닌 나락이었음을 깨닫는 일은, 누군가의 배신을 확인했을 때 보다 날카롭진 않았을지언정 그보다도 훨씬 묵직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 스스로에게 행한 오랜 배신에 가까웠기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쌓아 올린 것을 일순간 부수어버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이다. 왜 아니겠는가. 오랜 날들 동안 영원의 성을 쌓았는데 하루아침에 영원히 없애 버려야 한다니. 그 허무함과 억울함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역의 감정인 것은 분명하다. 제법 이성적으로 사는 편이라 자부했던 나 조차도 잘 달려오던 2인용 길에서 가드레일을 뚫고 다시 1인용 길로 급커브를 꺾은 후 한동안은, 멀미 같은 눈물이 도저히 멎지 않아 내 세계가 이대로 영영 침수되어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글을 쓰게 한 것은, 사실 오늘 밟은 레고 블록 하나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의 것들은 놀랍도록 세상의 것들을 투영하는 것들이 많다. 레고 또한 그렇다. 레고 조각은 잘못 밟으면 분명 눈물 나게 아프지만, 그렇다고 지뢰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내가 부순 성도 그랬다. 성을 부수는 것이 꼭 나를 부수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그토록 아팠지만 그토록 아팠다고 나는 성과 함께 사라지진 않았다. 결국 나는 성을 짓는 사람이었을 뿐, 성 그 자체는 아닌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끊임없이 짓고 부수고, 다시 짓고 부수고를 반복하기 위해 이 세상이라는 놀이터에 모인 꼬마들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네 칸짜리 블록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칸짜리 블록을 쓰고 영원히 튼튼하기를 바라면 어떻게 되는지를 배운 꼬마라면 언젠가는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겉보기에 그럴싸하다고, 괜찮을 거라 굳게 믿는다고, 전부가 아니라는 걸 모를래야 모를 수 없을 테니까.


결국 세상이 나를 속이는 것보다 무서운 건, 내가 세상을 속이는 것이다. 내가 속인 그 세상에 나 또한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언젠가 반드시 치명타로 돌아온다. 어딘가가 아예 고장나버리지 않는 이상, 내가 나를 영원히 속이는 일은 영영 불가능 하기에. 엉망으로 지은 것을 부수는 일이 두려워 스스로의 눈을 가리면, 영원히 눈을 감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레고 블록을 밟는 게 겁이나 스스로를 설득하면, 다음번엔 진짜 지뢰를 밟게 될지도 모른다.


레고 앞 꼬마들은 누구도 속이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블록을 골라 집을 짓고, 가장 예뻐하는 색으로 성을 꾸민다. 당연하다.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인생을 담아야 할 곳을 짓던 나는 왜 그리 많은 타협을 했어야만 했을까. 상대의 변명, 회피, 폭력, 속임, 배신, 상처, 외로움... 왜 그런 재료여도 괜찮다고 합리화 했을까. 결과적으로 레고로 만든 집보다 못한 곳이라면 인생을 담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레고 놀이에서 가장 힘든 파트는 늘 공들여 만들었던 것을 부수기로 마음을 먹고 행하기까지였다. 하지만 부술 때의 묘한 쾌감과 그 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시작의 설렘이 레고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을 떠올려보면, 생각보다 쉽게 인생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다시는 부수기 싫은, 그리고 부수려야 부서지지 않는 영원의 성을 지을 때까지 우리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레고 조각만큼 수도 없이 많은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다.


세상 어느 꼬마도 한 번 만들었던 것을 백 퍼센트 똑같이 반복해서 만들지는 않는다. 무의식중에라도, 블록 한 개만큼이라도 더 나아지려는 시도를 꼭 하게 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반드시 그 전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게 되어있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 이미, 레고는 인생을 짓고 부수고 다시 짓는 방법을 충분히 반복해서 가르쳐 두었던 것이다.


덕분에 내 안에는 언제나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멋진 것을 지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다시는 최악의 블록을 최선의 블록으로 교묘하게 속이지 않을 거라는 다짐도 함께. 다음 번에 짓게 될 것이 집이든 성이든 세계이든 간에 미처 몰랐던 새로운 과오를 발견하고 또 부수게 될 지언정, 지난 날 내가 한 번 부수었던 실수들을 내 손으로 또 짓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제는 레고 블록 하나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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