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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이 Apr 17. 2020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할 권리

<필경사 바틀비>, 1853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 1853




필경사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의 요구를 여러 번 거절한다. 유별나고 기상천외한 요구들은 아니었다. 서류 검토, 간단한 심부름,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은 그것들은 명령하기에 무리가 되지 않는, 화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들’이었으며 심지어 소설 말미에서의 바틀비는 자신이 고용된 이유이자 필경사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필사까지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나태한 모습을 보이거나 일을 그만두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꾸준히 성실하고 근면한 태도를 보이면서 사무실에 남기를 고집해 화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바틀비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심리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만의 일관된 거절 방식인 “I would prefer not to.” 라는 문장은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하겠습니다.” 라고 번역되어 있다. 옮긴 이가 무엇보다도 이 독특한 문장의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무를 선택하겠다는 그의 표현은 듣는 이와 독자에게 마치 요구받은 일의 정당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또한 고려하려 노력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나는 그의 육신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그의 육체가 아니었다. 그는 영혼이 아픈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영혼에까지는 닿을 수 없었다.





결말 부에서 소개되는 바틀비의 배경은 이러한 그의 행위가 까다로운 성미나 쓸데없는 고집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필경사 이전의 바틀비는 배달 불능인 우편물을 처리하는 업무를 맡던 사람이었다. 희망을 전달하려다 실패하고 죽음을 맞는 편지들을 처분해야 했던 그는 매일 절망과 마주해야 했고, 심지어 그 일에서조차 해고되면서 바틀비의 내면은 병들기 시작한다. 화자가 그의 첫인상에서 읽어냈던 ‘치유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독함’은 그 과정에서 생겨났을 테고, 이 때문에 화자는 본능적으로 바틀비에게 화 대신 연민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직업을 구하러 사무실에 찾아온 일과 그 사무실을 떠나지 않는 일은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의 의지를 보여주지만, 회벽 때문에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삭막한 환경에서 엄청난 양의 법률 문서를 필사해야 하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그에게 남아있던 조금의 인간성조차 빼앗았고 그렇게 자신의 한계에 닥칠 때마다 그는 거절을 택한다. 바틀비의 거절들은 자신에 대한 보호이자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한 최후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모든 이가 동일하게 생활해야 하는 교도소는 이러한 그의 병을 더욱 악화시켰고, 내내 생기를 갈망하던 그는 마지막 선택으로 회벽 틈새로 자라난 잔디를 보며 잠드는 것을 택한다.
 






바틀비의 독특한 언행에 대해 거절당한 변호사는 물론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 모두 이를 기묘하다 여기고 반감을 갖지만 시간이 지나자 ‘선호한다’는 표현에 매력을 느끼고 따라하게 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관료제 아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각 개인의 선호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인 19세기 말의 관료제는 임금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얼마든 노동을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간을 바라보았다. 즉 이러한 관료제 조직에 속해있는 피고용자는 공장에서 밤낮으로 돌아가는 기계 그 자체일 뿐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들어버린 바틀비의 모습은 마치 망가져 폐기된 기계를 연상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삶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관료제 하의 노동자는 주어지는 임무를 선택하거나 거절하기 어렵다. 표준화된 업무로 인한, 언제든 다른 이로 대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나오는 불안 때문이다. 비록 본 작품은 19세기 말 미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선택권의 상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비교적 관료제가 완화되었다는 현대에도 ‘까라면 까’ 라는 말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오늘날 소설을 읽는 독자 중 적지 않은 이가 바틀비의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번역가는 거절의 의미에 대해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행위가 기정사실화된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하지 않음’의 가능성과 이에 대한 선택, 이 두 가지를 긍정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작가인 허먼 멜빌 역시 활동 당시 독자와 비평가에게 좋은 평을 얻지 못해 자신이 쓰고 싶은 글과 팔리는 글 사이에서 고뇌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작가는 관료제 사회에서 거절의 가능성과 거절을 선택할 권리가 사라지는 인간 소외 현상을 지적하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행정부가 바뀌었다는 바틀비의 해고 사유는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매일같이 기삿거리로 등장하는 노사 갈등 이슈로 알 수 있듯 인간 소외 현상은 아직 진행형이다. 인간의 가치보다 성과를 우선시하는 사회에서의 인간성 상실을 비판하는 <필경사 바틀비>는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심각성을 재고하고 실감케 한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카프카의 글과 비슷한 느낌을 받아 막힘없이 읽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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