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 김초희 감독
아무 이유도 없이 관람을 미루게 되는 영화가 있다. 매력적인 소재에 믿고 볼 수 있는 제작진, 앞서 경험한 자들이 늘어놓은 칭찬 일색의 호평까지 모든 걸 갖추었는데도 이상하게 재생 버튼에는 손이 가지 않는 영화 말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나에게 딱 그런 느낌이었다. 2020년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로 꼽히며 수많은 국내외 영화제에 이름을 올리던 그 행보에 관람을 다짐했으나 미뤄 둔 과제처럼 한동안 체크리스트에만 머물렀다. 개봉 당시에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영화관을 밥 먹듯 오가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상영관 시트에 앉지 못했고, 심지어 직접 컴퓨터에 다운로드받아 둔 뒤에도 약 두 달가량을 바탕화면 아이콘으로만 방치해 두었다.
그러다 며칠 전 드디어 이 영화를 관람했다. 계기는 거의 우연에 가까웠는데, 다른 영화를 볼 작정으로 컴퓨터를 켰다 무심코 재생 버튼에 손이 갔다. 미루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게 관람을 마치고 나자 비로소 왜 이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영화와 사람 사이에도 연(緣)이 존재한다는, 얄팍하고도 단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대부분 내가 마음대로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기 마련이지만, 오랜 시간 영화라는 대상과 진심을 주고받다 보면 때로는 내가 아니라 영화가 주체로서 나를 불렀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1989)>이 카세트테이프 속 음성을 빌려 이 영화의 주인공을 깨운 것처럼 말이다.
나에겐 이 영화가 그랬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지금이라는 적시적기에 날 찾아왔다.
찬실이가 영화를 놓고 싶어진 순간, 비로소 영화가 찬실이를 찾아왔던 것처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찬실(강말금)이라는 인물이 걷는 삶의 궤적을 그렸다. 그 자취에는 전진하는 발자국뿐만 아니라 우뚝 멈춰 선 흔적과 바보처럼 여기저기를 헤매는 흔적까지 여과 없이 담겨있다.
전직 영화 프로듀서 찬실은 평생 영화만 바라보고 사느라 나이 마흔에 집도 돈도 남자도 없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영화 빼면 시체인 그녀는 애초에 다른 걸 바라거나 눈 돌린 적도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영화만 평생 찍으며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 얄팍한 바람마저도 예상치 못한 사정을 이유로 내팽개쳐지고 만다. 이 영화는 갈 곳을 잃어버린 그녀의 헤맴을 담아낸 방황일지와 같다.
그러나 길을 잃은 것도 잠시, 영화의 말미에서 찬실은 길고도 짧았던 방황을 마치고 다시금 올바른 길로 접어든다. 그녀는 어떻게 방향을 고쳐 잡을 수 있었을까.
그건 그녀에게 어긋난 방향을 알려줄 나침반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찬실에게 많다는 '복'의 정체다.
그 안에 영화가 있는 삶
첫 번째 나침반, 가슴 아픈 실연의 경험을 선사한 영(배유람)은 찬실에게 단순히 연애 상대로 그치는 인물이 아니다. 영은 앞만 보고 내달리던 찬실에게 조금 멀리 떨어져 자신의 삶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나누어 준 이이다.
씨네필의 폭소를 자아내기로 유명한 '노-올란?' 씬에서의 찬실은 자신과 그의 영화 취향이 판이하다는 사실에 극도로 기겁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녀가 영에게서 호감을 느꼈던 계기는 그와 공통점이 아닌 차이점을 발견한 순간들이었다. 자그마치 20년을 해 온 일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시나리오는 잘 써지냐는 물음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던 영에게 찬실은 처음으로 눈을 반짝인다. 당장의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단편 영화감독이라 소개하던 영. 그가 궁금해진 찬실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데,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가장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던 질문은 "영화 없이 살 수 있어요?"였다.
이에 대한 당시 찬실의 대답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NO"였을 테다. 그런데 자기만큼, 어쩌면 자신보다 더 영화에 진심인 것 같은 사람이 "YES"라 답하자 찬실은 당황한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기에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던 영의 대답은 찬실이 '영화로 향하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닌 삶'에 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영화라는 우물 속에 깊이 갇혀있던 찬실에게는 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하며 그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도약이었다. 이어지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라는 찬실의 대답은 단순히 그의 호감을 사려는 멘트이기보다는 그녀의 생각과 진심이 묻어나는 답변처럼 와 닿는다.
그런 그와의 실연을 겪고 돌아온 집에는 또 다른 나침반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이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와 다름없는 찬실만의 장국영(김영민)이다. 그는 찬실이 덮어두고 싶은 것을 집요하게 들추며 끊임없이 반문하고 일깨우는 존재이다.
"잘 된다면서요." "제가 언제 잘된다고 했어요, 잘 지낸다고 했지." 겉보기엔 말장난 같아도 살펴보면 깊이가 남다른 대화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다. 분명 시작은 그 사람이 좋아서, 함께 좋은 걸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본질은 사라지고 사회가 구분해놓은 애인이라는 관계에만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그러다 실패한다면 남는 건 실연의 고통뿐이다. 장국영의 말대로 애인이라는 이름만 아니라면, 몽땅 가지려는 그 욕심만 버린다면 친구로 오래오래 잘 지낼 수 있는데 말이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장국영의 말을 곱씹다 뼈 빠지게 입시를 준비하던 수험생 시절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다’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지금의 세상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분명 하는 일이 좋고 의미 있을 것 같아서 목표로 삼고 달리다 본질을 잊는 경우가 많다. 직업이라는 명사에 집착하게 되어 출발선에서의 의미는 퇴색된 채 어느덧 그 자체가 종착지가 되는 것이다.
장국영의 물음 덕분에 찬실은 본인을 돌아본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원했던 건 '영화 프로듀서'라는 직업이 아니었다. 바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보름달에 빌었던 소원대로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소중한 이들과 나누는 삶. 마침내 찬실은 본인이 원하던 것이 영화를 하는 '삶'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방점은 '영화'가 아닌 '삶'에 찍혀있어야 했다. 비로소 찬실은 영화를 사랑하지만 영화 없이 살 수 있다는 영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영과 장국영 이외에도 찬실에게는 수많은 나침반이 존재했다. 관객을 눈물짓게 하던 복실(윤여정)의 시구와 마치 지금껏 고생 많았다고 말하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있었다. 이런 산 공기를 쐬고도 다시 못 일어나면 사람도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다정하게 껴오는 소피(윤승아)의 팔짱도 있었다. 선배님이라면 언제든 OK니 함께 영화를 만들자는 후배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배경에는 먼저 내려가라며 든든하게 뒤에서 빛을 비춰주던 찬실의 인품이 있었을 테다.
이러한 나침반들을 발판 삼아 찬실은 경로를 재탐색하고 떠날 준비를 한다. 필요한 것들은 사실 찬실이 알지 못하던 새에 다 갖추어져 있었다. 영화에 대한 애정, 응원해줄 좋은 사람들. 남은 것은 본인의 욕망을 직시하고 방향을 돌릴 용기뿐이었다.
그래서 찬실은 시나리오를 쓴다. 원하는 삶으로 향하기 위해 지금 내디딜 수 있는 첫 번째 발자국을 찍은 것이다. 아마 한 시간 반에 거쳐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대상은 이 발자국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한 발자국을 내딛으려는 이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도 많은 용기를 요구하니까.
재미있던 점은 그녀가 처음으로 써낸 시나리오에 대한 영화의 반응이었다. 잠재되어 있던 그녀의 재능에 눈을 반짝이기는커녕, 영화는 소피의 입을 빌려 '도저히 지루해서 못 읽겠다'라는 혹평을 날린다. 이러한 혹평은 마냥 밝지만은 않을 미래에 대한 예고처럼 느껴지는데, 이 예고는 역설적으로 찬실에 대한 극도의 존중처럼 와 닿았다. 찬실이 감독으로서 성공할 것인지, 혹은 실패할 것인지를 함부로 추측하거나 어림짐작하지 않고 어느 쪽으로도 찬실의 미래를 담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마치 찬실의 장국영처럼 느껴졌다. 엔딩에서의 그가 영화의 결말을 보지 않고 상영관을 떠난 것처럼, 이 영화는 오로지 누군가가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고 믿어주는 역할에만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단한 믿음을 거스르지 않고, 찬실이라는 인물의 토대가 되었던 김초희 감독은 성공적인 장편 감독 데뷔를 했다. 이러한 현실은 마치 영화의 남은 마지막 조각을 완전무결하게 완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오래, 또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욕망과 솔직하게 마주한 찬실의 용기는 우리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알고 있는지, 또 하고 있는지 묻는다. 하고 싶은 일로 떠날 수 있는 적기라고 사회가 단정 지어 놓은 나이로부터 이미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 탓에 모르는 척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찬실의 해맑은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에 질문의 씨앗을 심어둔다.
이 영화에는 이러한 찬실의 용기뿐만 아니라 김초희 감독의 용기 또한 담겨있다. 영화의 모든 제작 과정이 김 감독에게 고밀도의 용기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 감독은 본인에게서 모티브를 따 온 것은 맞으나 픽션도 많기에 찬실이 온전한 자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밝혔지만, 영화에는 감독 본인의 이야기라는 것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 역시 상당하다. 오랜 시간 영화를 해 온 사람이 자전적 영화에 본인의 상처와 역경을 담아 관객과 동료들 앞에 적나라하게 꺼내놓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완성도는 김 감독이 본인에게 얼마나 솔직했느냐에 달려있었다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자신에게조차 솔직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직시하고 마주한 감독의 용기 덕분에 관객은 온전하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었고, 그 감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를 선사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 누군가 중 한 명이다.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차에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통해 케케묵었던 꿈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취업의 문이 좁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꿈이라 포장해오던 나의 실태를 직시했고, 용기를 얻어 지금껏 꽤 오래 준비해오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한번 방향을 틀어보기로 했다. 영화에게 마음을 뺏겼던 출발점에서 처음 꿈꾸었던 동사로서의 미래를 향해서 말이다.
문밖에 내놓은 책들이 저 멀리 버려지기 전에 찬실이 마음을 다잡은 덕에 다시 방으로 책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처럼, 아마 나의 복은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적당한 시기에 이 영화를 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적시적기에 나를 불러낸 이 특별한 영화, 그 감사한 부름에 응답하는 나만의 방식은 더욱더 커진 영화에 대한 애정이다. 오늘로 영화에게 내 마음속 공간을 한 평 더 허락하며, 사랑스럽고도 단단한 인물인 찬실을 따라가 보겠다 다짐해본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찬실의 미래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지만, 엔딩에서 찬실이 들고 있는 손전등이 내뿜는 빛은 그들이 소원을 빌던 달과 똑 닮았다. 그 강한 빛의 잔상은 영화의 여운과 함께 찬실이 설사 감독으로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진정한 행복에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여지를 남긴다. 솔직할 용기를 지닌 채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토록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할머니들의 삶에 가까이 가 닿지 않을까. 찬실도,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