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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이 Feb 15. 2021

네가 평생 낫지 않았으면 좋겠어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 Happy Together, 1997)

스무 살 여름에 소설을 썼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하다못해 어디 공모전에 제출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그 이야기가 너무 쓰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상당히 진심이었는데, 취미로 다니던 중국어 학원에서 30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지하철을 내버려 두고 1시간 반이 조금 안 되게 걸리는 버스를 고집하여 돌아 돌아 집에 왔다. 그 버스가 한강대교를 지나오기 때문이었다.


한강대교와 그 가운데에 위치한 노들섬은 소설의 중요한 소재였다. 매일 도보로 다리를 건너 출근하던 주인공이 여느 때처럼 생각 없이 걷다 우뚝 멈춰 선다. 너무나 지친 나머지, 어느 날엔가는 이 다리를 끝까지 건너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덮쳐서다. 비록 그게 오늘은 아닐지라도, 난 언젠가 무너져버리고 말겠구나. 그런 불안감에 덜컥 잠식된 주인공은 곧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습한 여름밤 한강대교 위에 서서 가만히 바람을 맞고 있자면 복잡하게 꼬인 것 같던 전개가 절로 풀려나가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아예 노들섬 버스 정류장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몇 시간이고 글을 썼다. 그때는 노들섬이 개발되기 전이라 인적 하나 없는 정류장이었는데, 셀 수 없이 많은 차량이 발 앞을 스치고 마침내 노트북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집에 돌아가는 식이었다.


한참을 잊고 살았던 이 오래된 기억이 다시금 머리에 스친 건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를 관람하면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을 쓰던 기억이 아니라 그 당시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을 다시 마주한 것일 테다. 할퀴면서도 서로를 놓지 못하는 아휘와 보영을 보며 무언가를 떠올렸다. 상대가 자신을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기에 되려 더욱 거칠게 몰아붙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상대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들. 난 아휘와 보영에게서 오래전 내 주인공이 지었던 얼굴을 보았다.



그 소설에 그려내고 싶었던 건 특정 상대에 대한 '분리 불안'의 감정이었다. 떠나가려는 계절의 끝을 붙잡고 몸이 부서져라 버티는 그 숭고한 집착과 질척임,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감정에 못내 끌렸다. 내 곁에 있어주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죽어 줘'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에 대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그 신물 나는 굴레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의 두 인물 역시 상대가 떠날 것을 지독하게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은 각자의 삶을 좀먹는다. 영화가 아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탓에 더욱 관객의 안타까움을 사는 건 그일 것이다. 아휘는 보영을 가두려 애쓴다. 오프닝에서 차가 고장 났던, 갈 곳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허허벌판에서마저 어딜 가냐며 날을 세우던 그는 <해피 투게더>의 메이킹필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에 소개되는 비하인드 씬에서 역시 방에 보영을 두고 나오며 자물쇠를 사야겠다고 중얼이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다른 비하인드 씬에서, 여권을 찾지 못해 방을 통째로 뒤집어 놓은 보영이 분에 못 이겨 뛰쳐나가려던 순간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보영." 이때 카메라는 곧바로 인물을 비추지 않기에 관객은 목소리의 주인을 모른 채 잠시 기다린다. 상황 상 아휘일 게 당연할 텐데도, 순간 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꼭 다른 사람의 육성 같은 몹시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뭐 워낙 신출귀몰한 편집의 귀재로 유명한 감독이니 금세 다른 씬의 다른 인물로 넘어갔나 했는데, 알고 보니 아휘가 맞았다.


이때 아휘는 진심 어린 경고를 한다. 지금까지는 계속해서 너를 받아줬지만 이번에는 아닐 것이라고. 나도 떠날 수 있다고. 다만 그러기 싫었을 뿐이라고. 이때 양조위가 뿜어내는 눈빛과 표정을 보며 깨달았다. 사실 이 한 순간이 바로 아휘라는 인물의 본모습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 내내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지 보영을 만나기 전 원래의 그는 사실 이 목소리를 지녔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를 잃는 게 두려워 항상 기다리고, 망가진 걸 고치고, 떨어진 걸 주우며 살도록 선택한 것일 뿐. 아마도 낯설게 느껴진 목소리는 그간 자신을 죽여왔던 아휘를 표현해내고자 한 양조위의 의도였을 테다.




그러나 나의 눈에 더 밟혔던 건, 내가 그려내고자 했던 분리 불안의 형태와 더욱 흡사했던 인물은 보영이었다.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통보하고 훌쩍 떠났다 또 맘대로 돌아오는 그가 처음에는 태생적으로 한곳에 묶여있지 못하는 철없는 보헤미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곧 그를 잠식하고 있는 외로움과 불안이 보였다. 피상적으로는 관계의 성패를 쥔 채 제멋대로 구는 무뢰한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오히려 아휘보다 더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물이다. 더 많이 하는 사람이 진다는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그는 결코 승자가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 있다. 헤어졌던 그들이 아휘가 일하던 탱고바에서 안내원과 손님으로 재회하던 때에,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내내 다른 이들과 어울려 다니던 보영은 아휘의 속을 뒤집어 놓겠다는 못된 심보를 갖고 있다. 떠나기 위해 차에 올라타던 마지막 순간까지 아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그제야 힐끗 뒤를 돌아본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앞을 향하는 흑백 화면 속 보영의 얼굴에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했다는 성취감도, 아휘의 반응에 대한 감정적 동요도 없다. 오로지 찾아볼 수 있는 건 그의 담배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필연적인 고독뿐이다.


보영은 아휘와 다르게 불안정하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다. 그 역시 아휘를 사랑하고 관계를 지켜내고 싶지만 자꾸만 발을 밟아 탱고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아휘와 함께하는 순간은 그곳이 지구 반대편일지라도 집에 있는 것 같은 안정을 주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보영을 몹시 불안하게 만든다. 언젠가 다가올 그의 부재가 점점 더 두려워지던 그는 한껏 끝내 아휘를 밀어낸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종종 끝을 말하는 보영. 그 불안한 홀로서기는 매번 실패하고, 결국 다시 아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아마 아휘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날지라도 그의 쓸쓸함은 상대를 춥게 만들 것이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분리 불안이 바로 이것이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 너 없으면 안 돼' 라 쉽게 툭 뱉어지는 말뿐인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 당장 나 자신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 도저히 현명하고 차분하게 굴 수는 없는 것. 이럴 거면 차라리 떠나라고 역정을 내면서도 그렇게 혼자 남겨지면 아직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불을 붙잡고 몸을 떨며 우는 것. 이제는 떠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은 기대 때문에 문 옆을 지키게 되는 것.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대로 부서져내리는 것.


보영이 잠들어 있던 아휘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던 것은 물론 사랑스러워서였겠지만, 한편으로는 눈을 뜨면 자신을 떠날 것 같아 차라리 이대로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에게서 나의 천성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구아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삐거덕대는 두 사람이 추는 탱고는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러닝타임 내내 어딘가 경직되어 있던 아휘가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였던, 또한 유일하게 보영에게 기대는 모습이 담겼던 탱고. 관객은 그들의 미소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보영과 아휘는 틈 사이로 드는 한 줄기 햇볕이 너무나 간절해서, 행복이 비치면 동시에 그만큼 그 행복이 깨질까 날을 세우게 되는 사람들이었다. 오래도록 행복하기도(Happy), 같이 있기도(together) 어려웠던 그들이었기에 두 사람의 연애에는 한 씬이 멀다 하고 정신없이 컬러와 흑백이 뒤섞여 있다.

아휘는 보영이 떠날까 두려워 안정적인 관계에 집착했고, 보영은 그들이 안정될수록 두려워했다. 그들은 너무도 달라서 헤어진 뒤에야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생전 찾아본 적 없던 문란한 생활에 발을 들여도 보고, 담배를 잔뜩 사 집에 쌓아두어도 보지만 너무 늦었다. 상대는 떠나고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안될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아휘는 이를 깨닫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영화는 홀가분하게 마음을 정리한 듯한 보이는 엔딩에서의 아휘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이 그들의 진짜 끝이 아니기를 마음을 다해 바라게 만든다. 홀로 이구아수 폭포로 향하던 길 주위의 풍경은 모두 흑백으로 연출되었지만 차를 운전하는 아휘만은 여전히 색 속에 존재한다. 아휘가 떠난 집에 홀로 남은 보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아휘가 본인의 몸을 닦아주던, 추억이 묻은 자리만 골라 닦으며 아휘가 했던 행위를 흉내 냄으로써 몸으로 추억을 되새긴다.


그렇게 여전히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떠나는 아휘가 침대 위에 여권을 떡하니 올려둔 것조차 이제 미련 없이 너를 놓아주겠다는 선포가 아닌 '나를 보고 싶다면 홍콩으로 따라오라'라는, 보영과의 재회를 바라며 남겨 둔 메시지라고 왜곡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재회'를 의미한다는 이구아수 폭포에 뒤늦게 도착한 보영이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 회귀에 성공했기를 바라며.


그들이 사이좋게 한 짝씩 나누어 꼈던 귀걸이가 속히 제 짝을 찾기를 기원한다. 여느 습작이 그렇듯 끝을 맺지 못한 채 추억으로 남겨진 내 소설 속 주인공들과는 달리, 두 사람만큼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다소 사심이 가득한 바람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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