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소식을 전하자 친구가 기가 찬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야 너 비혼 주의라고 네 인생 계획을 멋들어지게 말하면서 나까지 동경하게 해 놓고, 홀랑 지만 결혼하더니! 재작년까지 딩크 어쩌고 외치던 소린 어딜 가고 이젠 임신이라고?"
정말로 억울해 보이는(?) 친구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나는 불과 3, 4년 전까지만 해도 비혼, 딩크와 같은 말들은 겁도 없이 잘도 외치고 다녔었다. 친구들이 모이면 소리 높여 비혼을 찬양하던 나는,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 집안과 우리 집안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슬그머니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하다가, 종국에는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청첩장을 돌리고야 말았다. 당시 배신감에 치를 떨던 친구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전에 맨션 하나를 구입해 몇 층 몇 호에는 누가 살자, 우리 다 같이 솔로로 모여 살다가 장례도 치러주자고 농담처럼 말하던 멤버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시초가 나였고 말이다. 어찌 됐건 축하한다고, 아기도 낳을 예정이냐고 묻던 친구들에게 나는 또 한 번 지키지 못할 호언장담을 했다.
"아니 절대. 둘이 재미있게 살다가 늙어 죽을 거야."
오늘은 아기가 내 아랫배 어딘가에 집을 지은 지 14주쯤 되는 날이다. 어딘가 중간에 많은 이야기가 생략된 것 같고 갑작스러운 전개지만(!) 그렇다. 결혼한 지 햇수로 4년, 꽉 채워서는 3년이 다 되어갈 즈음에 우리 부부의 계획하에 고맙게도 아기가 찾아왔다. 3년간 서로를 지켜보며 생긴 믿음이 '부모라는 자리는 너무 크고 무거운 것이어서 우린 해내지 못할 거란 두려움'을 깨버렸다.
갑자기 생긴 감정이나 믿음은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어떤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내서 세상 빛을 볼 수 있게 하고, 내가 자신 없어하는 부분은 이 사람이 상쇄해주며 어떻게든 이 가정을 잘 가꿔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은 결혼 생활 중 여러 상황을 대처하는 서로의 모습을 지켜보고, 평가하면서 서서히 스며들듯이 생긴 거였다.
무엇보다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내 결점과 남편의 결점을 파악하고 인정하는 과정 자체였다. 처음 딩크를 외쳤던 날부터 꾸준히 우리 부부는 내가 왜 부모가 될 수 없는지를 서로에게 읊어내려갔다. 흡사 고해성사를 하듯이. 나는 엄마에게 이러이러한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아기에게도 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어릴 적 너무 예민해서 평범한 가족과 살았어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게 느꼈고 이런 기질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참을성이 너무나도 없는 것 같아서, 아이에게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줄 자신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도가 지나치는 훈육을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서 등등.
이렇게 서로에게 후련하게 2년간을 쏟아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저 사람이 스스로 부모로서의 결격사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내인 내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실제로 그런 면이 있었더라도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점이었다거나(?). 어쨌든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건 아니었는지, 그렇게 신혼부터 2년간 한쪽이 다가섰다가 다른 쪽이 물러섰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합의가 됐고, 그 생각이 계속해서 변하지 않는지 1년여간 서로를 지켜본 뒤 계획을 확정했다. 도합 3년이란 시간이 걸릴 정도로 신중했다. 우리가 계획하는 이 일은 절대 한쪽의 바람만으로 강요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임신 초중기로 접어들며 호르몬이 제 맘대로 널뛰면서 나는 이전보다 더 자주, 더 엄격하게 스스로가 부모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검열하기 시작했다. 비혼도, 딩크도 실은 부족한 내 존재가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나왔던 건 아닐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 자격을 누군가가 부여해주는 거라면 차라리 쉽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도 영 모르겠고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렵지만 하나는 안다. 난 원래도 누군가를 이유 없이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데, 꼬물대는 손, 발 입술 모두 나와 그가 합작을 해서 만든 존재가 세상에 있다면? 아. 벌써부터 엄청나게 커지는 이 마음을 진정하려고 큰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 이거 하나만은 잘 알겠다.
지금도 벌써부터 "우리는 아이가 온전히 자신으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렇죠?"하고 남편에게 일러두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신에게 새기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지만,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아직까지는 흐릿한 초음파 속에 자리 잡은, 나비를 닮은 콩알만 한 뇌만 봐도 기특하고 예뻐 죽겠으니까 말이다.
나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부모가 될까 했던 걱정들이 이제는 아이가 서른이 되어도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극성 부모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바뀌었다. 영 중간이란 게 없는 것 같지만 뭐.. 막연히 두려웠던 결혼생활이라는 것도 지금껏 나름대로 잘해오고 있는 것처럼, 육아도 우리 둘이 함께면 잘할 수 있을 거란 용기가 마구마구 샘솟는다. 일단은 이 근거 있는(?) 용기에 기대 봐야겠다. 우리 강아지 포함, 한 지붕 아래 뛰는 네 개의 심장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