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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아 Mar 04. 2019

치앙마이 두 달 살이

두 달 살이니까. 

한 도시에서 한 달 이상을 머물게 되면 단기 여행을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를 얻는다. 시간적인 여유도 물론이지만 심적인 여유도 굉장하다. 간혹 열심히 찾아간 가게가 오늘따라 영업을 쉬거나,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는데 하필 나의 방문을 맞아 폐업을 했다거나, 택시기사가 말도 안 되는 길로 잘못 들어서 1시간을 날렸다고 해도 탄식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글피도 있기 때문이다. 단기 일정으로 여행을 할 때는 계획에 어긋나는 변수가 생기면 차선책을 선택해도 계속해서 그 앙금이 가시질 않는다. 모든 게 내 계획대로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어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 살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해외여행 중 월요일에 찾아간 플리마켓이 주말에만 여는 일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뿐만 아니라 더한 일도 수도 없이 많다. 부아는 치밀지만 ‘할 수 없지’라는 심정으로 넘겨버리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이번 치앙마이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정말 큰일이다. 세상은 이렇게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치앙마이 두 달 살기라는 것은 실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고, 이토록 근사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뭘 먹을까’ 생각한다. 소고기 국수를 먹으러 갈까. 아니면 연어와 반숙이 올라간 에그 베네딕트? 오랜만에 오징어가 톡톡 씹히는 해물 팟씨유도 먹고 싶다. 무얼 골라도 상관없다. 그냥 먹으러 가면 되니까. 못 먹은 메뉴는 오늘 저녁에 먹어도 되고, 내일 점심에, 혹은 일주일 후에 먹어도 된다. 기껏 고민해서 선택한 소고기 국숫집이 오늘 갑자기 휴가를 가서 문을 닫았어도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 번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던져주면 그뿐이다. 그리고 구글맵을 켜서 주변에 갈만한 음식점이 있는지 실시간으로 검색한다. 갈 곳이 너무 많다. 가고 싶던 음식점 대신 급하게 찾은 주변의 다른 음식점을 찾아갔다가 인생 맛집을 발견하는 마법. 치앙마이 두 달 살이에서만 가능하다.



두 달 살이는 일정이 없다. 내일은 뭘 하고 뭘 먹고 몇 시에 어딜 갔다가 어떻게 돌아올지, 지역별로 동선을 꼼꼼히 짜서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치앙마이의 두 달은 한껏 게으르고, 한껏 이기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을 서서히 깨워가며 차도 마시고, 샤워도 하고, 요가도 하다가 밥을 먹으려 나가다 말고 수영을 하러 가기로 한다. 점심을 먹고 와서 수영을 할 예정이었지만 오늘따라 정오가 되기 전부터 해가 뜨겁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커다란 티셔츠를 그 위에 훌렁 입어준다. 비치타월과 수경, 500ml의 작은 생수통을 비치백에 챙기고 1층에 위치한 수영장으로 달려 나간다.



티셔츠와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달려 나가는 내 두 발로 돌바닥의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텅 빈 오전의 수영장으로 몸을 던지면 ‘자유’라는 것의 정의를 여기서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간발의 차로 뒤늦게 도착한 꼬마 아이 하나가 혼자 물놀이를 하다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몇 시까지 놀아도 돼?”



나와 남편은 놀만큼 놀다가 슬슬 배가 고플 것 같아질 때쯤 알아서 나온다. 대략 20분 놀았나 싶은데 40분이 훌쩍 지난 경우도 있고, 1시간은 된 것 같은데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때도 있다. 어쨌거나 상관없는 거다. 그렇게 ‘꼭~해야 하는’이라는 숙어가 빠져있는 우리의 두 달은 들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런 두 달이다. 그런데 꼭 어릴 때 놀이터에서 시간 모르고 놀던 기억처럼 자연스럽다.


간 밤에 남편과 침대에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다. 치앙마이의 밤하늘에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개수의 별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자로 재어 찍어놓은 듯한 세 개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남편이 말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얽매이는 것도 없이, 먹고, 자고, 수영하고 살 수 있다니. 이 나이에도 이렇게 살 수가 있구나.".


곰곰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그 말에 찰떡같이 공감이 됐다. 빈둥대기의 달인인 나 역시 13살 이후로 이렇게 지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이처럼 살지만 꾸중이나 잔소리마저 없이 살 수 있다는 것, 이 나이에 이만한 사치가 또 어딨을까? 매일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은 바란 적도 없다. 일 년에 두 달이면 그걸로도 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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