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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아 Mar 06. 2019

치앙마이에서는 모든 게 느리게 간다

서울의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일찌감치 해가 자취를 감추는 겨울 녘이면 부쩍 하루가 더 짧아진다. 지하철의 문이 열리자마자 꽉 찬 가방에서 쏟아지는 소지품처럼 일제히 쏟아져내리는 사람들, 모두들 집에 가스불이라도 켜 두고 온 듯 단거리 달리기를 시작한다. 지금 오는 열차를 놓쳐버리면 그만큼의 휴식을 또 한 번 뺏기게 될 것이다. 언제나 촉박하고, 각박하고, 전투적인 나의 도시, 서울. 당연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잡히지 않는 ‘휴식’, 그 하나를 사수하기 위한 치열하고도 바쁜 싸움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곳.


서울에서 6시간을 날아오면 닿는 곳, 치앙마이는 모든 게 느리게 간다. 사람도, 시간도, 구름도, 고양이도. 이 곳에 오면 느리게 흐르는 치앙마이의 시간에 갇혀 답답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알맞은 옷을 입은 듯 그 시간이 몸에 착 붙는다. 인간은 역시나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급해지고, 기민 해지는 것이 아닐까. 인간처럼 바쁜 포유류는 세상에 또 없으니까.


간혹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람들과 업무를 하다 보면 진전의 속도가 느려 답답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 곳에서 지내다 보면 그 이야기에 수긍이 간다. 그들은 아마 서울의 속도를 절대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몇 달 지내보니 확실히 날씨의 영향이 크다. 1월인 지금은 건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한낮에 돌아다닐 때만 조금 덥고 뜨거운 정도지만, 1년에 반 이상이 우기에 해당하니 그 무더위 속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아무리 건기라지만 열심히 활동해야 할 오전부터 한낮까지의 기온은 확실히 사람을 쳐지게 만든다. 냉방이 강력한 실내에 있어도 서울의 지하철 역에서 경보로 걷던 내 속도를 이곳에서 재현하는 게 쉽지 않다. 이곳의 내가 한 걸음을 뗄 때, 서울의 나는 세 걸음 째 걷고 있을 테다.



슬렁슬렁 걷다가 잠시 카페에 들어가 쉬다가, 다시 슬렁슬렁 걷다가, 다시 상점에 들어가 휘적휘적 구경을 한다. 괜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기웃대다가 해가 뜨거운 대낮에 숙소로 돌아와 달콤한 낮잠을 청하며 빈둥댄다. 느릿느릿. 계획도 없이, 일정도 없이, 느리게 유영하듯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릿느릿 재생되는 치앙마이의 일상은 느린 만큼 더 많은 나만의 이야기를 품는다. 서울에서는 손 사이로 바람 지나듯 빠져나가는 순간들이, 이 곳에서는 하나하나 날아와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인다.      







치앙마이에서는 동물도 느리게 산다. 확실히 잠깐만 살펴봐도 한국에서 보던 잽싸고 날쌘 고양이들이나 낯선 사람을 보면 대차게 짖는 개들과는 조금 다르다. 동물들도 마치 느긋하고 ‘그러려니’ 하는 태국인들의 성정을 닮은 것 같은 모습이다. 아무 데나 늘어져 있거나 사람을 봐도 본체만체한다.


아 뭐야~ 누가 깨웠어 귀찮게~


고양이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똑같이 떠돌이여도 한국에 있는 동물들보다 더 말랐고 더 꾀죄죄하다. 고양이들은 여유 넘치는 자태와 달리 한국 고양이들에 비해 더 초롱초롱하고 야생적인 눈빛을 가지고 있다. 반면, 개들은 한국의 귀엽고 초롱초롱한 강아지들과 다르게 더 늙수그레하거나 때 탄 인형같이 꼬질꼬질하다. 그래도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그런지 귀엽기만 하다. 개들의 경우 음식점 야외 테라스나 가판대 근처를 서성거리면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서는 사람 먹을 것과 동물 먹일 것을 구분해서 주는 편이지만 치앙마이에서는 현지인들처럼 내가 먹던 음식을 조금 나눠서 주기도 한다.


한국의 한 겨울에는 길에서 떠돌아야 할 길고양이와 유기견들에 맘이 이만저만 쓰이는 것이 아닌데, 치앙마이의 경우에는 날씨가 사계절 따뜻한 편이다 보니 그런 걱정도 없어 보인다. 아무데서나 늘어지게 자고 있는 태평함이 볼 때마다 평화롭다. 마치 스쳐 지나는 수많은 행인들 중 하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동물들을 지나치는 태국 사람들의 모습도 재밌다. 어디서나 속 편하게 잠들어도 누구도 내쫓거나 깨우지 않고, 가끔 음식을 나눠 받기도 하는 치앙마이 동물들의 하루하루. 사람과 동물에게 모두 당연해 보이는 그 일상이 자연스러워서 보기 좋다. 치앙마이의 가장 큰 매력은 인위적이지 않은 그 ‘자연스러움’ 아닐까.



애석하게도 느린 행동거지는 개와 고양이뿐 아니라 쥐와 비둘기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길목 곳곳에서 차에 치인 쥐와 비둘기의 사체를 발견하곤 한다. 도대체 어떻게 느리면 새가 그렇게 치여서 죽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태국은 아직 분리수거가 시행되지 않아 길에 쥐가 많다. 물론 워낙 쥐가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 중 하나이다 보니 돌아다니는 모습이 시시각각 목격되지는 않지만, 치앙마이에 오래 지내다 보면 한 번쯤은 높은 확률로 목격하게 될 것이다. 커도 정말 큰, 거의 새끼 토끼에 가까운 크기다. 차에 치여 길에 늘어져있는 쥐 사체를 보면 가끔은 그 널찍한 등판 때문에 ‘자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든 적도 여러 번이다.


하도 흔한 일이다 보니 이 곳 사람들은 쥐나 비둘기가 해부되어 길바닥에 전시되어 있어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화석이 되어 바닥에 무늬로 남을 때까지 아무도 치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처음 치앙마이에 와서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쥐나 비둘기 사체를 봤을 때는 그 잔상이 지워지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생활 2주 차가 되니 평정을 찾는 법을 터득했다. 아직도 입을 틀어막고 남편의 어깨에 매달려 공중에 뜨다시피 지나가기는 하지만 동물의 사체가 있을 때는 최대한 못 본 척하고 지나간다. (그래도 쥐의 사체는 누군가가 제법 잘 치우는 편이다. 차마 쥐까지 화석을 만들기는 어려운 가보다.)


처음 쥐의 사체를 발견한 것은 혼자 요가 클래스에 다녀오던 길인데, 쥐 사체를 보고 놀라서 종종 거리며 뛰는 내 요란한 발재간을 보고 좌판에서 국수를 팔던 상인들이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아마 그들 눈에 그렇게 빠른 스텝은 치앙마이 살면서 처음 본 게 아닐까. 내가 봐도 두 달 동안 치앙마이에서 제일 빨랐던 건 그 날의 내 발놀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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