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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아 Mar 07. 2019

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

치앙마이에 오며 끌고 온 캐리어가 나 두 개, 남편 두 개. 도합 네 개다. 남편한테 괜히 하나를 넘겼지만, 사실상 오롯이 내 짐만 대략 세 개라고 볼 수 있다. 해외에서 두 달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정말 짐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했던 걸까. 


숙소를 옮겨 다니느라 있는 대로 짐을 다 꺼내 풀어놓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꺼내서 썼다. 그러다가 마지막 숙소에 와서야 신이 나서 온갖 짐을 다 풀어버렸는데 짐의 삼분의 이 정도가 옷이었다. 맙소사. 심지어 캐리어 밑바닥에 입지도 않은 옷들이 빳빳하게 차곡차곡 개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쩌자고 이 많은 여름옷을 이고 지고 이곳까지 온 걸까?


두 달 전, 서울에서 옷을 챙기며 이 옷들을 다 입고 말리라 하는 심정으로 스마트폰 메모장에 챙긴 옷들의 목록을 적었다. 그리고 옆에 간략한 코디법까지 적어놓았다. 실로 철두철미한 준비과정이다. 그런데 막상 치앙마이에 와서는 이 메모를 두 번도 채 열어보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나는 그런대로 제법 외모를 신경 쓰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 비해 편하고 실용적으로 옷을 입고 다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편한 차림은 아니다. 화장도 나름 꼼꼼히 챙기는 편이고 편한 옷 안에서도 나름의 규정(?)이 있어서 꾸민 듯 안 꾸민 듯 한 옷을 찾아다닌다. 그렇다 보니 여름 나라에 가서 여름옷들로 코디할 생각에 들떠 이렇게 저렇게 정리해본 것이다. 


사실 이렇게 옷 목록을 정리하면서 ‘헛짓인가’ 싶은 생각이 살짝 스치긴 했다. 작년 방콕 한 달 살이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화려한 옷들로 캐리어를 채워서 떠났는데 서울에 돌아오기 열흘 정도 전부터는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거나 몸매가 드러나지 않은 펑퍼짐한 원피스들 위주로 입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첩만 봐도 방콕에 도착하고 일주일 정도는 있는 대로 꾸미고 있는 사진이라면 그 후로 점점 자연인(?)의 구색을 갖추기 시작하는 과정을 볼 수가 있다. 


그때 ‘앗차’ 싶었던 것이 치앙마이에서도 ‘역시나’였다. 캐리어 구석에서 꺼내어 펼쳐보지도 않은 옷들은 치앙마이에 가져올 필요가 아. 예. 없었다. 치앙마이는 방콕보다 한결 더 필요가 없다. 치앙마이에서 넉넉한 셔츠에 편한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면서 그간 내가 시선에 얼마나 예민하고 얽매여있었는지 톡톡히 깨닫게 됐다. 신발은 또 몇 켤레나 챙겨 온 건지. 가져온 신발 중에 굽이 조금이라도 붙은 신발은 신지도 않았다. 바닥에 달라붙은 듯 납작한 슬리퍼만 주야장천 끌고 다니는데 그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모른다. 발을 다시 꽉 막힌 신발에 넣을 수 있을지가 의문일 정도다. 



화장도 점점 간소해졌고, 머리도 드라이기로 휙휙 말리면 끝이다. 말 그대로 ‘도대체 누가 날 보는데?’의 심보다. 치앙마이에서 거닐다 보면 가장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국적의 여행객들은 역시나 중국인이다. 한국 사람들도 제법 꾸며진 차림으로 다니는 편이지만 요즘의 젊은 중국 여성들은 정말 화려한 여행 패션을 선보인다. 새하얀 피부와 새빨간 레드립도 거든다. 가끔 그들 옆을 스쳐 갈 때의 나는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여기에 있을 사람의 냄새가 물씬 난다고 해야 할까. 


얼굴과 몸은 최근 부쩍 더 타버려서 붉은 듯 까무잡잡한 듯 그을렸다. 그런데 희한한 건 거울 속 내 모습이 제법 맘에 든다는 거다. 어딘지 건강해 보이는 것도 있다. 헐렁한 무채색 티셔츠에 까만 반바지를 입고 납작한 슬리퍼를 신은 내가 썩 좋다. 여태까지의 나는 내가 좋아서 꾸민다는 주장 아래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속마음을 켜켜이 숨겨두었나 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나라에서 어디까지나 외지인의 신분으로 두 달을 지낸다는 것은 이렇게나 모든 빗장을 열어젖히게 만든다. 아마 이곳에서 직업을 갖고 진정한 현지인이 되어 살아가기 시작한다면 서울의 내가 다시 슬그머니 전투태세를 갖출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유명하다는 쇼핑몰이나 카페에 가보면 젊은 치앙마이 친구들은 k-pop 스타나 할리우드 스타들 느낌이 물씬 나는 복장이나 메이크업을 뽐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어느 나라나 유행과 시선에 민감한 사람들은 다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센스도 참 뛰어나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것을 보면 나도 여기에 정착해 산다면 또 별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해외에서 두 달을 지낸다는 것은 ‘깍두기’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다음에 다시 해외에서 오래 머물기 위해 떠나게 된다면 짐을 꾸릴 때 내가 깍두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지만 닥치면 결국 ‘한국에서는 차마 입기 민망한 옷’을 한 무더기 개어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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