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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아 Mar 08. 2019

두 달 동안 수영장이 집에 있는 삶

가슴이 답답하거나 어쩐지 무기력해질 때는 물에 들어가 앉아있는 상상을 한다. 어떤 날은 하얗고 반질반질한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앉아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박한 온천장의 자그마한 노천탕에 앉아 하염없이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며, 또 다른 날은 자쿠지가 딸린 수영장에서 종일 물과 함께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물 한가운데 앉아있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두 팔이 지느러미라도 된 양 하늘하늘 움직이면 내 몸 사이로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럴 때면 오로지 세상에 물과 나, 둘만의 시간인 듯했다. 


일 년 내내 더운 나라에 오면 시도 때도 없이 물에 뛰어들 수 있어서 참 좋다. 특히 태국은 어느 곳에 묵든 대부분 수영장이 있다. 치앙마이 역시 옮기는 숙소마다 비취색 수영장이 딸려 있으니 존재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된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제대로 ‘휴식’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 있다. 삽화 같은 초록빛 야자수 그늘,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선베드와 잔에 서리가 낀 레드 오렌지 컬러의 에이드, 그리고 카리브해의 그러데이션을 닮은 수영장이 그렇다. 상투적이지만 상투적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치앙마이가 하와이나 몰디브같이 해변을 끼고 있는 휴양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30도가 넘는 기온만으로도 리조트를 닮은 수영장에 수시로 들락거릴 명분은 충분하니까. 선베드에 눕다시피 앉아 멍하니 수영장만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이 훌쩍 간다. 물이란 것은 늘 그렇다. 끝없이 흘러가도, 고인 채로 반짝거려도, 어떤 것을 품든 품은 것을 그대로 비춘다. 



수영장이 품은 터키색 타일들이 그대로 비쳐 청명한 해변에라도 온 듯하다. 타일을 터키색이 아닌 핑크색으로 칠해놓으면 어떤 풍경일까? 끈덕진 딸기 셰이크에 몸을 던지는 기분이 될까? 그렇다면 새하얀 타일이 깔린 수영장은 플레인 요거트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로 꼬리잡기 놀이를 하며 줄곧 바라보아도 시시각각의 햇빛과 공기만이 들고나갈 뿐, 수영장은 1.4m 수심만큼의 높이에 그대로 고여 오르락내리락 찰랑거리고 있다. 물 잔에 담긴 물처럼 파진만큼의 공간 안에서 차박차박 흔들리는 그 모습이 알 수 없는 안정을 준다. 나를 오롯이 받아줄 것 같은 믿음을 준다. 그 속을 바닥까지 그대로 비춰 보여주면서. 


     

인적이 드문 오전의 수영장은 유난히 더 차갑고, 더 정직하다. 유리같이 편편한 수면이 내가 들어가는 순간 일제히 나를 따라 갈라지며 파동을 만든다. 나로 인해 만들어진 파동만이 넓은 수영장에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는 나 하나론 끄떡없다는 듯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처음 고개를 넣을 때의 온 털이 쭈뼛 서는 차가움은 오간 데 없고, 머리칼 사이사이 피부 사이사이를 어루만지는 기분 좋은 차가움이 움직임을 따라 흐른다. 



수심이 적당히 깊으면 더 좋다. 섰을 때 발이 닿지 않다시피 하는 깊이라면 오히려 더 오래 헤엄치게 된다. 끝에서 끝까지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오랜만이라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수면 위로 올라와 가쁜 숨을 몰아쉴 때의 통쾌함(?)이 자꾸만 수영장을 찾게 한다. 그래도 레일마다 일렬로 끝없이 수영해야 하는 실내수영장보다는 내 맘대로 수영하며 걸으며 풍경 한 번 보고 쉴 수도 있는 야외 수영장이 언제나 좋다. 


제대로 된 영법으로 수영장을 완주하는 일은 몇 번 정도 하다가 그만두고 만다. 개구리처럼 고개를 빼고 헤엄쳐 다니거나 슬렁슬렁할 일 없이 걸어 다니기 일쑤다. 수면 아래로 아슬하게 까치발 선 나의 두 발이 보인다. 터키색의 타일을 그대로 품은 물빛이 두 다리와 두 발을 물들인다. 차라락 차라락. 발 앞꿈치를 딛으며 무용이라도 하듯 물속을 느리게 거닐면 걸음마다 물빛을 닮은 푸른빛 일렁임이 따라붙는다. 텅 빈 수영장에서는 나와 물만의 교감이 더 선명해진다. 두 달을 내리 매일 찾아도 언제나 설렌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수영복을 입고 물을 만나러 갈까 생각하며 침대에서 비비적거린다. 오늘은 아침부터 해가 쨍쨍한 가장 더운 날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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