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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Apr 29. 2018

"일본을 긍정적으로 볼려면 반드시 실패헙니다!"

한일 양국 간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는 문화인류학 이야기


 한국 문학의 거장 박경리 선생은 도올 김용옥 선생과의 대담 중 일본의 문명을 두고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Civilized Savage)'이라 지칭한 바 있다. 실로 파격적이다. 일국의 문명을 그런 거친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아무리 거인巨人의 통찰에서 나온 말일진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할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지식인으로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다. 자신의 저작에서조차 짙은 일본어투가 배어나올 만큼, 수많은 일본 문학을 접하고 연구해 온 대문호의 통찰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 아니다. '감정'이라는 단어를 운운하기에는 오히려 한국만큼 일본을 냉정하게 재단하고 연구해온 나라가 또 없기 때문이고, 타국의 문명에 대한 이해를 완전하게 했네 못했네를 따지기에도 인류사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흘러왔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진짜 이유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라는 소리이자, 그저 실로 수많은 것들이 얽히고설키며 빚어낸 결과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직접 찬찬히 뜯어보면서 생각해보자. 어째서 우리가 일본을 두고 '가깝고도 멀다'고 수사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일본은 한때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을 정도의 강국이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떠받치는 사상이나 관념적 체계 -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인문학적 기반'은 다소 부실하다거나 심지어 위험한 측면까지 있다는 지적이 학계 등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빈번히 있어 왔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저명한 문화인류학 저서인 <국화와 칼>은 그 제목부터가 일본 문화의 총체를 함의하고 있다.


 일본의 문화에는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특유의 폐쇄성(고립성)으로 대표되는 민족성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파급력을 미치고 주목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특성이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그러나 문제는, 동시에 그만큼 지나치게 탐미주의-유미주의적인 경향도 띄게 되었다사실이다. 한 마디로, 너무 한 우물만 파고 들어가 버렸다는 소리다. 이는 '국화'라는 수사처럼 실로 아름답고도 가냘픈 것이었지만, 동시에 근본적으 합리, 도덕, 이성과 같은 현대 인류 문명의 근간 자체와는 대척점에 위치한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를 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다가도, 어쩐지 거기에서 어떤 집착이나 광기까지 느끼게 되고 마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꿰뚫어 본 박경리 선생은 이를 두고 '일본을 긍정적으로 보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며, 덧붙여 '일본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로맨티시즘'이라 혹평했다.





한국의 '국민' VS 일본의 '왕'


 그야말로 일본은 고립성으로 표상되는 나라이다. 인접한 마을임에도 제각기 다른 축제를 즐기고, 민간 신앙인 '신토(神道)'로 대표되듯 토착신의 종류만 수백만에 이르러 집집마다 다른 신을 모실 정도로 문화의 영역이 극히 협소하다.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꼽자면, 보통 한국에서는 어떤 분야의 최고를 지칭할 때 모두가 두루 좋아한다는 의미로 '국민-'을 붙이는 반면, 일본은 '-왕' 붙인다. 이는 곧 어떤 고립된 한 분야에서 극의에 다다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뜻이다. 언어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니, 1970년대부터 신조어로서 논의되어 온 바 있는 '오타쿠(御宅)'라는 사회문화적 현상과 개념을 생각해보라. 어느 문화권에나 '마니아'는 있는 것이겠으나, 일본은 그것을 상회하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야 했을 만큼 유달리 심취하고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이외에도 세계 표준 규격에 따르지 않고 꿋꿋하게 독자적인 규격을 고집하는 등, 대외적으로 일본의 산업이 흔히 '갈라파고스'에 비유되곤 한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만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영역에 복속되기보다는 스스로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 곧 세계 제일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바이기도 했다. 이는 마냥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니었고, 실제로 그 고집을 실현해낼 만한 능력도 있었다. 1980년대, 그 찬란하던 황금기가 저물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본의 소설가 '후타바테이 시메이'. 그가 번역했던 소설 속 단 하나의 문장으로도,  일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소설가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이반 트루게네프의 <첫사랑>이라는 책을 번역하면서 'I Love You'라는 문장을 고민 끝에 '(이제) 죽어도 좋아(死んでもいいわ)'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사랑을 죽음으로 노래한다니, 과도한 의역이었겠으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낭만적인 문장으로 느껴졌던 것인지('낭만'이라는 단어도 지극히 일본스러운 단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다)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지만, 사실 여기에도 일본 특유의 정신이 짙게 녹아 있다.


 일본에서 대문호로 추앙받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오히려 일본인들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이들을 찬미했다. 문인으로서 극의에 다다른 그 순간, 죽음으로 인해 시간은 정지하고 찰나는 박제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출구 없는 센티멘탈리즘의 말로도 일본인들에겐 비극이 아니었고, 그저 '벚꽃잎처럼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사무라이의 '할복'이라거나, 그 악명 높은 자살특공대 '카미카제神風'에서도 드러나듯, 일본은 전통적으로 명예를 위해서 목숨은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는 정신이 있었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대문호들 중 한 명인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대 우익 세력과 군부의 궐기를 호소하며 할복 자살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인사들은 어떤 부정적인 이슈에 휘말려 명예가 실추되는 순간이 오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쉬이 목숨을 끊다. 시간을 매듭짓는 수단으로써 얼마든지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정신의 발현인 셈이다. 한국은 물론 대개의 문화권에서는 자살이 죄악시되거나 이해조차 받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꽤나 특이한 경우이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순리일 시간의 한 허리를 베어내어 영원히 간직하려는 집착, 자살마저도 낭만으로 여길 수 있는 민족성에서 어쩐지 비자연적이며 비인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창덕궁의 '후원後苑(또는 비원祕苑)'과 료안지龍安寺의 '카레산스이枯山水'식 정원  


 보통 한국인들이 '정원'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고 하면, 기하학적으로 정갈하게 조성된 서구권의 그것 정도를 떠올리지, 한국 고유의 양식은 잘 그리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외적으로도 동아시아 삼국 중 중국과 일본의 정원 양식은 널리 알려져 있는 데 반해, 한국은 그 실체를 아는 이가 드물다. 이는 한국의 정원 양식이 '차경借景(경치를 빌린다)'이라고 해서, 자연 그대로에 정자 한 채 정도 지어놓는 것을 정원이라 여길 정도로 자연미를 중시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유교의 영향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곧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삼았기에, 정원 양식 역시 산수를 그대로 옮기되 어떤 인공적인 꾸밈은 최소화해야 했.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정원이란 곧 세계를 한 장소에 축소해 놓은 것이었다('축경縮景'). 자연의 특정한 순간을 포착하여, 오직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아름다움을 사각 틀 속에 담아 놓아 정지된 시간을 영원의 형태로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모래, 돌, 이끼 등을 소재로 이용해 극도의 인공미를 구현하였으며, 이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서로 인접한 국가임에도, 어째서 문화적으로는 이렇게 극명히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각국이 과거 고대와 중세 시기를 어떻게 지나쳐 왔느냐 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고대에는 중국의 한자와 불교문화를, 중세에는 유교문화(+성리학)를 적극 수용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중국을 뛰어넘어 보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단 외부에서 받아들인 문화이기는 했어도, 그런 '원조'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실제로도 상당한 심도와 성취도를 보여줌으로써 마냥 맹목적이거나 수동적이지는 않았음을 증명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그 양상이 전혀 달랐다. 고대의 문화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전승되었고, 불교나 한자 같은 것도 깊이 수용하지는 않았고 단지 형태 정도만을 차용한 정도였기에, 중세를 거치면서 당대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보편적인 문화를 공유하고 형성하지 못했다. 덕분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온전히 지켜낼 수는 있었으나, 이는 동시에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해서 역설적으로 후세에는 이게 오히려 이질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점차 그 특유의 고립성이 더욱 짙어지게 되었고, 결국 오리지널리티를 지나치게 보전하려고 한 나머지 정작 자연과 인간에게서 유리되고 말았다.

 본래 보편적으로 상호 공유되는 문화는, 특정한 범위의 집단이 공감하는 감정이나 가치관인 '보편 정서'를 형성하기 마련인데 일본의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런 덕분에 근대에 이르러서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질적인 서구 문명을 그 어떤 국가보다도 효과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거기에 점차 인간이 자리할 곳은 희미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근본적인 불안정성과는 무관하게, 일본의 문화는 그야말로 막강한 파급력을 자랑했다. 홀로 고립되어 멈춰버린 시간을 품고 있으니 세계인들의 시선이 집중될 만했다. 자연과의 어울림,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순응하는 한국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주목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미디어 등지에서 논하는 '한류 열풍'에도 불구하고 막상 실제로 외국인들은 한국 문화를 보면서 무엇이 고유한 특색인지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편이다. 동아시아 삼국을  구분해낼 수 있는 서구인들은 일반적으로 잘 없고,  명백한 한국의 문화를 일본이나 중국의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 허다하다. 거대하고 웅장한 중국, 말초적이고 강렬한 일본에 비하면 한국은 확실히 '삼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과거부터 문文을 내세운 문치주의 국가로서 수준 높은 정신문화를 보여준 국가였다. 이런저런 오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봉건 왕정 체제가 500년이나 지속된 것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아도 돋보일 만한 사례다. 수많은 외침의 역사와 자국민의 문화유산에 대한 무지(구한말 당시 길거리에 내다 버려진 기록유산들을 군고구마 불쏘시개로 쓰는 일 따위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대한 기록유산들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기록물에 대해서는 실로 대단한 집착을 보여준 나라이기도 했다.


 반면 옛것을 잘 보존한다는 일본은 정작 2000년대까지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문화유산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는 <일본서기> 등 자국이 자랑하는 고전古傳 기록유산들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는 등 등재 기준에 충족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이런 약점을 크게 의식하고 있었던 터라, 2010년대에 들어서는 급히 몇몇 유산의 등재를 추진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대부분 고전古典은 아니며, 여전히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는 가장 빈약한 수준이다. 한국 사관들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팔만대장경, 훈민정음 해례본, 직지심체요절, 동의보감 등 다수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등재 추진 중인 기록물이 다수 있다.

 

 또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전쟁의 역사란 곧 내전의 역사뿐이었고, 그나마도 '절은 절대 파괴하지 않는다'같은 나름의 철칙이 있긴 했었어서 전란을 거치면서도 사찰 속에 보관한 여러 문화재들은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외침의 역사였고, 수많은 전쟁과 식민 통치를 거치면서 막대한 문화재들이 소실되거나 외부로 유출되고 말았다. 오히려 그런 악조건을 고려하면, 한국은 문화재를 상당히 잘 보존해온 편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일례로 유교의 경우에는 후발주자였던 한국이 정작 오늘날엔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인 상황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으로 소실된 유교 문화를 한국으로부터 역수입하여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한국은 늘 거대 제국들의 등쌀에 짓눌리면서도, 언제나 꾸준하고도 길게 버텨왔던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서구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과는 달리 오리지널리티에 집착하지 않고 거의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수용하려고 하는 경향도, 지난 역사를 놓고 보면 그렇게 주류에 융화됨으로써 생존과 안정을 도모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항상 시류의 흐름에 종속되려 하는 속성이 강하다. 남들이 다 하는 건 나도 해야만 하며(유행),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나도 땅이 있어야만 하니까).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면 너도나도 광장에 나가 응원을 해야 하고, 유행가를 모르면 '간첩' 취급을 받는다. 항상 당대의 주류나 주변의 환경에 대한 즉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삼라만상 모든 것들과 나는 같아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항상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과 닮아야만 하며, 그것이 곧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라 여긴다. 위에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와 대조해보면 이는 특히 두드러지는 경향성이다.


 그런데 근현대는 지난 인류사 중 서구 문명이 패권적 지위를 차지한 유일한 시기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중국이 주류였으니 한자며 유교며 거기에 녹아들었던 것이고, 지금은 영어며 성형(서구적인 심미안)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서구 문화와 일체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현대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면 고유의 정체성이 옅고 줏대가 없지만, 좋게 말하면 항상 능동적이고 변화무쌍하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예외는 없다. 옛것을 온전히 보전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만큼 이질적인 것들의 본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에는 강점을 보인다. 항상 당대의 보편성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현재까지도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체계만큼은 헌법 서문에 명시되고 있을 정도로 끝까지 과거를 놓지 않고 있다. 일단은 민주주의의 형태를 갖추고 있을지언정(그마저도 외부로부터 '주입'당한 것이지, 국민 스스로 쟁취한 역사는 없다), 꼭두각시 또는 허상으로나마 봉건적 체제를 현대와 공존시키려 한다. 일본은 유사 이래 근 100여 년을 제외하면 거진 봉건제 국가였다. 이는 서구 문화를 그렇게 흡수했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오리지널리티만큼은 보존하려 한 데에 따른 결과이다. 자신들의 그 특유의 발음으로 영어를 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뿐더러, 오히려 흡수하여 일종의 자국어화를 꾀하려 할 정도다. 세대가 교체되면서 점차 옅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수백 년에 쳐 기술을 전수하고 가업을 잇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그런 정서를 가진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지금까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본 바를 정리하자면, 일본은 고유성을 고집하는 문화이며, 한국은 보편성을 추종하는 데에 능통한 문화라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 역사적 이유 등에서 비롯된 민족성에 근간을 두는 경향성이다. 다만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보았을 때, 일본의 경우에는 고유성에 대한 집착이 그 강력한 문화의 힘 만큼이나 폐쇄적이고 위험한 쪽으로 치닫기 좋다는 것이고, 한국은 정체성을 다소 상실할 수는 있되 시대의 흐름에 융화되기에는 용이해서 안정적으로 길게 흘러가는 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특정 문명 간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일종의 특성으로서 무엇이 더 인간적이거나 자연적인 경향을 보이느냐는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박경리 선생의 논지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직접 스스로 양국의 문화를 비교하고 고찰해 본다면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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