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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Mar 17. 2019

최고의 시대인가, 최악의 시대인가

언어가 시대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언어는 시대상을 거울처럼 비춘다. 당대의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가, 곧 그 사회의 전반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작금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먼저 과거의 세대를 구분하는 명칭들을 살펴보자. '민주화 세대', '베이비 붐 세대', '386 세대', 'X 세대', '에코 세대', 'N 세대', '밀레니엄 세대' 등 - 격동의 역사를 거쳐 온 한국 사회였던 만큼, 대부분의 단어 속에는 어떤 굵직한 사건이 녹아 있고 그 시대의 주류적인 관심사나 현상 따위를 포괄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현재를 보자. 한국판 프레카리아트를 지칭하는 '88만 원 세대', 3포 - 5포 - 7포 - 9포로 진화하는 'N포 세대', 역사상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못 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는 '다크 밀레니얼 세대' 등, 어쩐지 급격히 네거티브해진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아가 세대 명칭은 아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 - '청년실신', '이태백(이십 대 태반이 백수)', '인구론(인문대 졸업생 구십 퍼센트는 논다)', '달관', '포기', '~수저(수저 계급론)',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을 보면 그런 경향성은 더욱 짙어진다.

 

 무언가 다른 점을 눈치채겠는가? 사회를 구성하는 단어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비탄과 절망으로 찌들어 있었던 시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 같은 단어가 오르내렸건만, 어느새인가 누구도 더 이상 일말의 희망조차 논하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소확행' 같은 단어는 좀 나은가 싶기도 한데,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움켜쥐지 않으면 감히 행복을 논할 수 없게 된 현실을 시사한다고 보면 여전히 처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요컨대 결핍되고 좌절된 욕망이 내지르는 비명이라고 보아야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욕심이 없어져서 소소함을 노래하게 된 것일 리는 없다는 소리다.


 여하튼 이상한 일이다. 누구든 그 시대의 십자가를 각자 짊어지고 살아간다는데, 유독 작금의 세대만 인내력이나 의지가 부족하기라도 한 것일까?





1997년, 서울 대학로

 '불확실한 미래' - 90년대,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꽤 자주 쓰이던 구절 중 하나였다. 깊은 상흔을 남겼던 IMF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것들이 혼란스럽게 뒤엉키며 세기말적 종말론이 자못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을 정도로 불안정했던 혼돈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있었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아직 알 수가 없을' 뿐이지, 반드시 어떤 정해진 결말로 향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은, 더 이상 미래를 논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지엽적인 현상이나 사실에만 주목하면서, 오롯이 지독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이미 미래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기대라는 것은 앞으로 닥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할 때 할 수 있는 것이고, 절망이라는 것은 반대로 모든 것이 너무나 확실할 때 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는 이렇다 할 만한 변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 그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떠한 도박조차도 해볼 수 없을 것이라는 선견.


 왜 그토록 사람들이 로또 같은 일확천금에 목을 매는가? 1등 당첨 확률이 8백만 분의 1에 불과하고, 기댓값으로 따지면 결과적으로 손해느니 하는 그런 객관적인 사실 따위를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이 시대에 아직 남아 있는, 어쩌면 거의 유일할지도 모를 '불확실성'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tvN, <알쓸신잡> 시즌 2 9회 캡처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지식인인 유시민 씨는 이러한 '시대의 문제'에 관한 의견을 종종 직간접적으로 피력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지금 시대라고 딱히 별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당장 본인부터가 적잖은 풍파를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대표적으로 청년 실업 문제에 관해서는,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청년들은 사회나 환경 탓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골자의 발언을 과거 정치인 시절부터 수차례 해왔다. <알쓸신잡>이나 <썰전>에서는, '일본의 사례를 보건대, 우리도 길어야 10년 정도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라고 일축하기도 했고,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에서는 '과거 전쟁 세대면 모를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는 거의 없을진대 가장 힘든 세대인 양 구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스탠스를 취했다.

 

 이는 일견 객관적인 통찰인 듯하지만, 결국 지독히 방관적인 시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제 아무리 선하고 현명한 사람이라 할지언정, 타인의 죽을 병이 당장 자신의 손가락에 난 생채기보다 아프게 느껴지지는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 이치이므로 이는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문제의 현상과 원인을 치열하게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미 그 단계에서부터 '내가 보기엔 아닌데?' 하며 부정해 버린다면, 더 이상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당장 하루하루 나이가 차고 있는 취업준비생에게 '한 6~7년만 기다리면 일자리 많이 생길 거래!' 같은 말은 하등 가치가 없는 것이고, 고시원 쪽방에 구겨지듯 누워 밤낮으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에게 '그래도 전쟁통에서 꽁보리밥이나 겨우 먹던 시절에 비하면, 이제는 짜장면도 치킨도 먹을 수 있잖아!' 같은 말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선 소위 복장 터지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세대 갈등 같은 것이 무익한 것으로 죄악시되고, 나이를 불문하고 '꼰대'적인 사고가 그토록 비난받는 이유다.


 그러므로, 과도기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미래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딛고 있는 세상이 지옥도이며 수라장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훗날 지금의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지는, 시대의 문제를 절감切感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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