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 풍경

영화 '제노바'

by 무덤덤

엄마와 두 딸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중이었다. 어린 딸들은 눈을 가리고 소리만 듣고서 자동차의 색깔을 맞추는 놀이에 푹 빠졌다. 까르르 웃는 딸들의 웃음 소리와 휙 하고 지나치는 자동차 소음이 뒤섞여 다소 부산스럽지만 세 모녀의 한때가 무척 다정하다. 게임에 열중한 막내딸 메리(펄라 하니-자딘)가 운전중인 엄마의 눈도 가린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엄마의 비명 소리, 그리고 메리의 절규가 오버랩된다. “엄마!”


이렇게 거짓말처럼 엄마는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순식간에 가슴 속 어마어마한 공간이 뻥 뚫려버린 남은 가족들의 표정이 가마득하다. 떠난 이가 남긴 텅 빈 공간의 공허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남은 세 가족은 도망치듯 시카고를 떠나 이탈리아의 제노바로 간다.


좁은 골목들이 촘촘하게 이어진 제노바 중심가에 거처를 마련한 세 식구는 낯선 곳에서 본격적으로 ‘잊는 일’을 시작했다. 아빠 조(콜린 퍼스)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큰 딸 켈리와 메리는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가끔 아름다운 해변을 찾기도 한다. 이들은 지중해의 빼어난 항구도시에서 한가롭게 휴가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제법 치열하게 ‘잊는 과정’을 겪는 중이다.


겉으로는 싱그럽게 웃곤 하는 메리는 매순간 죽은 엄마를 만난다. 그 죽은 엄마가 자신을 떠날 때마다 ‘엄마’를 부르짖으며 펑펑 울고, 그런 메리를 조는 밤마다 위로하며 잠을 설친다. 켈리는 메리를 볼 때마다 치솟는 원망과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제노바에서 만난 또래 남자와 어울리는 것으로 ‘잊는 일’에 매진한다. 조 역시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으로 ‘잊기’를 행한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제노바라는 특정한 장소는 꽤 사실적인 영화 속 영상의 멋들어진 배경이기도 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죽은 쥐가 엎어져 있는 더럽고 좁은 골목길의 도심과 지중해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해변을 동시에 품고 있는 제노바의 이중성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상을 살지만 내면에서는 ‘잊는 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세 가족의 극심한 혼란과 연결된다.


제노바의 좁고 더러운 거리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듯 세 식구는 전혀 낯선 곳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이가 남긴 공허함을 잊는 중이다. 영화 ‘제노바’는 그러니까 남겨진 이들이 먼저 떠난 이를 잊는 경치를 스케치한 한 폭의 풍경화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의 여름, 세 가족에게 몇 차례의 커다란 고비가 지나가고 일상의 평화는 이내 찾아오지만 그들에게 ‘잊는 일’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사랑이 컸던 만큼 그들에게 남겨진 공허감은 생각보다 거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소중한 무언가를 잊어야 하는 일, 그 풍경은 애처로우면서도 기특하고 치열하면서도 잔혹하다. (2009년 11월 작성)


제목 : 제노바(2009, 영국)

OTT : 씨네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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