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레슬러'
80년대를 호령하던 스타 레슬러의 눈부신 시절은 영화의 오프닝으로 약 5분 동안만 묘사된다. 20년 후 이 늙은 레슬러에게는 과거의 영광을 추억할 시간조차 없다. 오직 치열한 밥벌이가 처절하게 펼쳐질 뿐이다. 이렇게 영화는 늙은 레슬러의 굽은 어깨, 그리고 헐떡거리는 숨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업무시간에 ‘야동’이나 보고 있는 마트 매니저에게 빈정거림을 받으면서도 랜디는 그에게 일거리를 구걸한다. 그래야 그나마 혼자 사는 컨테이너 집세를 마련할 수 있으니까. 이렇듯 왕년의 스타 레슬러, 랜디의 말년은 외롭고 비루하다. 그럼에도 단잠을 깨우는 동네 꼬마들과 웃으며 놀아줄 정도로 그가 나름대로의 삶을 근근히 꾸려가는 이유는 주말마다 링 위에서 아직도 경기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몸이 늙어 움직임이 둔하고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중의 수도 줄었고 링을 환하게 비추던 조명의 밝기도 많이 약해졌지만, 링 위에서 펼치는 레슬러들의 경기 혹은 퍼포먼스는 언제나 의욕적이며 성실하다. 그리고 랜디에겐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단지 한 시절을 풍미한 스타의 초라한 말년을 다룬 뻔한 신파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랜디 역을 미키 루크가 맡으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화는 숭고하다고 느껴질 만하게 실감나는 삶의 리얼리티를 풀어낸다. 영화 속 랜디의 삶이 실제 미키 루크가 걸어왔던 삶의 여정과 아주 많이 겹쳐 있었던 탓이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얼굴 근육에도 주인공의 연기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던 건 그것이 랜디의 것이든 미키 루크의 것이든 스크린 가득한 한 노구의 어깨에 한 남자의 삶이 온전히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어진 리얼리티로 영화는 값 싼 신파가 아닌 그 어떤 처절한 인생의 혹한기를, 보는 이의 뼈마디에 새긴다. 영화의 엔딩 크래딧과 함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The Wrestler’가 흘러나오면, 눈물 대신에 오한이 밀려오는 건 그래서다. (2009년 2월 작성)
제목 : 더 레슬러 (2008, 미국)
OTT : 웨이브, 왓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