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녀(1960)'
여름은 공포영화의 계절이라는 영화계 상식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것 같다. 관객들은 여름이라고 해서 공포영화를 일부러 찾아보지 않을 뿐더러 실제로 올해 여름에 개봉된,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소수의 공포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존재감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이제 거의 완벽한 비주류로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무관심이다.
이쯤 되니 어린 마음에 막연한 공포를 안겨주었던 한국 고전 공포영화 몇몇 작품이 새삼 떠오른다. 전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1960~80년대의 한국 고전 공포영화들의 정서는 유독 독특하다. 그곳에선 치정, 원한, 집착, 음기(陰氣)가 기묘하게 어우러져 한바탕 난장이 벌어진다.
영화 ‘하녀’는 1960년작이다. 명보극장에서만 10만명이 봤으며 그 해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사실 ‘하녀’는 공포영화는 아니다. ‘치정 스릴러’라고 보아야 더 정확하다. 하지만 공포영화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으스스한 느낌이 영화 안에 충만하다.
영화 ‘하녀’를 9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컬트무비로 명성을 떨치게끔 한 요소를 몇 가지 추려보자면,
첫째, 영화가 풍기는 공포의 향기를 80% 이상 홀로 당차게 뿜어내고 한 여배우다. 하녀 역의 이은심이다.
그녀는 1935년 일본 나고야서 태어나 1946년 경북 상주에 정착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살던 중 영화감독과 제작자 등 관계자들의 잇따른 러브콜을 받았고 데뷔는 1959년 유두연 감독의 ‘조춘’을 통해서 했다. ‘하녀’ 이후에도 3편에 영화에 더 출연했지만 이은심의 영화는 ‘하녀’ 한편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50년도 더 전의 영화인지라 현재의 눈으로 볼 때는 어쩔 수 없이 고전영화의 촌스러움이 늘 감돌고 있음에도 이은심은 홀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온 양, 그 느낌이 낯설고 새롭다. 눈을 잔뜩 옆으로 흘기며 상대를 째려보는 눈빛, 죽은 쥐를 망설임 없이 냉큼 잡으며 배시시 웃는 미소 등 이은심의 천진난만한 연기는 그 어떤 처녀귀신보다 섬뜩하다.
둘째는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2층 저택이다. 그 중 벽의 무늬가 계속 신경을 거스른다. 나무 뿌리가 벽을 어지럽게 타고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뱀들이 벽에 엉겨 기고 있는 것도 같은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벽에는 베토벤과 닮은 험상궂은 남자의 헌팅 트로피(머리 벽장식)가 자리하고 있다. 그 머리는 이 저택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치정극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주시하고 있다.
피아노 방의 벽장식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커다란 엽전 모형과 평범한 흰 사각틀의 사진액자, 그리고 각시탈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탈들이 한 방 벽에 골고루 걸려 있다. 이 괴상한 조합은 대체 왜일까. 1960년 한국영화계에서 영화미술의 역할이라는 것이 미미했으리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저 생뚱맞은 소품들은 왠지 께름칙하다.
마지막 셋째는 남자 하나를 둘러싼 ‘여자들’이다. 영화 ‘하녀’에서는 동식(김진규)을 둘러싼 세명의 여자가 있다. 하녀와 아내(주증녀),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여공(엄앵란)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들 여자들의 욕망이 영화 ‘하녀’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주된 요소가 되고 있다.
여공의 동식을 향한 짝사랑은 자식 있는 유부남이라는 제약을 가볍게 떨쳐낼 정도로 저돌적이고, 하녀가 동식을 도구로 2층 저택의 안주인으로 기어이 들어앉는 과정 역시 거침이 없다. 하지만 여공과 하녀의 욕망은 아기가 초콜릿 과자를 탐내는 것 같은, 다소 순수한 면이 있었다면 아내의 욕망은 훨씬 어른스러워서 간악하다.
남편의 박봉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이 2층집을 지어 살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재봉틀 솜씨 덕분이다. 실력이 아주 좋았던지 집안에서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리는 아내 덕분에 2층집을 지었고 셋방살이를 면했다. 중산층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내는 간신히 이뤄낸 이 성과물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하녀에게 낙태를 종용하고 나중에는 하녀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여러모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영화 ‘하녀’는 뒤늦게나마 김기영 감독을 한국영화사에서 손 꼽히는 명장으로 만드는 마술을 부렸다. 그리고 영화에서 파격적으로 쓰인 ‘불륜’의 설정은 이후 한국영화가 즐겨 쓰는 단골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영화 '하녀'를 신호탄으로 이후 줄줄이 출현하는 한국 고전 공포영화들은 어리바리한 남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남녀상열지사를 좀 더 쫄깃하게(?) 만들어주는 제2, 제3의 이은심이 등장해 각종 공포의 향연을 펼쳐낸다. 옛 한국 공포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이들 여성(혹은 악녀)들의 활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니 그 재미 또한 만만치가 않다. (2014년 9월 작성)
제목 : 하녀 (1960, 대한민국)
OTT :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