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역'
영화는 피를 흘리며 서울역 광장을 가로질러 느릿느릿 걷는 백발의 노숙자에서 시작한다. 요즘 뜨는 말로 '맥락도 없이' 등장하는 이 노숙자 할아버지가 영화 '서울역'에서 '부산행'에 이르는 거대한 아비규환의 시초였다. 하지만 노숙자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어, 거대한 비극의 숙주가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궁금증은, 피 범벅이 된 채 힘겹게 서울역 한복판을 걷고 있는 이 노숙자에게 어느 누구 하나 도움을 주지 않고 있음을 깨달을 무렵 사라진다.
밤이 돼서도 서울역을 배회하는 사람들이란 결국 집이 없는 사람들일 거다. 정말 집이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고, 집에 들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서울역 어슬렁거리기를 택한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이 보기에 번듯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갈 집이 마땅찮은 이들에게 여관주인, 역무원, 경찰, 경비원 등속의 사람들은 그저 "가라"는 말만 반복한다. 대체 어디로 가나. 갈 데가 없으니 기어이 서울역 어딘가에 끈질기게 붙어있느니라 이 사람들은 모조리 좀비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던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런데 복수는 아니다. 공격을 하긴 하나 복수가 아닌 무의식의 공격이다. 이 사람들에게 복수라는 자의식도 없다.
어쨌든 서울역 근방을 배회하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인육을 갈구하는 좀비가 되었고 혜선과 기웅 그리고 석규는 오늘, 그들의 고약한 인생보다 더 지옥 같은 밤을 견뎌야 한다. 가엾은 주인공들은 아수라장이 된 서울역을 빠져나가 찬란한 희망의 아침 태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지옥과 하등 다름 없는 서울역의 밤은 완벽한 절망으로 일단락된다.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한 아이의 북받치는 울음과 노랫소리로 곧 태어날 아기의 따뜻한 가정(집) 하나를 끝내 지켜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그래도 남겨는 놓았다. 같은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행'은 그 실낱 같은 희망마저 잔인하게 내팽개쳐 버리고 절망으로 완벽하게 뒤덮인 어두컴컴한 서울역으로 끝내 마무리한다.
그런데 아주 작은 희망을 남긴 '부산행'보다는 뭘 어찌해볼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한 절망을 남긴 '서울역'의 세계가 더 공감이 되는 건 왜일까. '서울역'은 좀비라는 낯선 감염체를 제외하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빼닮은 공간과 인물, 상황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원조교제로 여관비를 벌어야 하는 가출소녀 혜선과 피시방에 미친 기웅은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보는 아이들이다. 복지를 논하던 청년이 노숙자에게 풍기는 냄새에 손사래를 치는 모습은, 전철역사 구석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노숙자들을 보고 역시 눈살을 찌푸리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좀비를 피해 막다른 곳에 피신해 있는 시민들을 향하는 공권력의 폭력은 좀비의 그것보다 더욱 공포스럽다.
구질구질한 인생들이 기생하는 서울역에서 전철로 한두 정거장만 가면 성공한 인생들이 들어앉은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이 아파트(집)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꿈꾸는 욕망의 집합소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주인공들의 마지막 그 끔찍한 참극은 우습게도 최고급 아파트를 실현한 모델하우스에서 벌어진다. 생의 마지막에서마저 진짜 집이 아닌 가짜 집이라니. 지독한 절망이다.
수많은 소시민이 멋들어지게 설계된 모델하우스를 보며 자신의 완벽한 보금자리를 꿈 꿀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당장 가 닿을 수 없다. 내 집 한 칸 갖는 데 천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안정의 욕구를 채울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이 서울역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좀비가 되어 무의식의 복수를 한다. ‘서울역’에 지옥도가 펼쳐진 긴긴 밤이었다. (2016년 8월 작성)
제목 : 서울역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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