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
이른 아침 여느 날과 다름 없이 부산행 KTX 열차는 서울역을 출발했다. 출발 직전 꽤나 다급해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이 헐레벌떡 겨우 기차에 올라 탄 것을 빼면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이 부산행 열차는 이렇게 '감염자'를 태우고 이미 아비규환이 된 서울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천만영화'라는 대업을 위해 운행을 시작했으나 너무 빠른 시간에 그 대업은 곧 이뤄질 모양이었다. 개봉 일주일만에 영화는 관객수 600만명을 훌쩍 넘었다.
대한민국이란 낯선 땅에 진출한 좀비가 이렇게까지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여태껏 몇 편이나마 만들어졌던 한국의 좀비 영화들이 겸연쩍어질 지경이다. 많지도 않은 한국의 좀비영화 팬들은 주로 '본토 것'에 열광했고 '우리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국 좀비영화는 씨가 마르기 직전이었다.
이 척박한 땅에 2016년 한여름에 '부산행'이 불쑥 등장했다. 어린이들은 절대 볼 수 없는 애니메이션을 주로 만들었던 연상호 감독이 KTX 열차 안에 '스타배우'들과 제법 성능이 뛰어난 '좀비'들을 함께 태워 실사 영화를 만든 것이다. 서로 꽤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체로 보이는 영화 '부산행'은 그러나 칸에서 먼저 호응을 얻더니 몇 달 후 한국에서 1600개가 넘는 상영관을 차지했다.
'부산행'의 천만 관객 돌파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평소 한국 좀비영화의 부진에 안타까워 마지않았던 필자는 '부산행'의 괴력에 가까운 흥행이 급작스럽게만 느껴진다. 앨범 몇 백 장 팔던 인디밴드가 하루 아침에 '밀리언셀러'가 된 것 같은 심경이랄까.
하지만 영화 '부산행'은 좀비라는 외래 괴귀(怪鬼)만 빼고 보면 그동안 한국에서 천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재난영화들과 비슷한 모양새를 지녔다. 딸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 임신한 아내를 지켜야 하는 남편, 살기 위해서는 어떤 악행도 불사하는 극악무도한 이기주의자, 젊디 젊은 청춘 커플에 노숙자, 그리고 사이 좋은 자매 할머니들.
남녀노소가 적절하게 섞인 등장인물에게 주기적으로 펼쳐지는 재난상황,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는 사람들과 안타깝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물 샐 틈 없이 펼쳐진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가득 뿌려진 '신파'는 '부산행'의 흥행 추진력을 배가시킨다. 상화(마동석)가 곧 태어날 딸의 이름을 지어줄 때, 석우(공유)가 딸을 위해 마치 순교하듯 희생할 때 관객들은 비록 누군가가 강요한 듯한 울음을 울지만 '신파'는 재난 영화를 채우는 다양한 성찬 중에 하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영화 '부산행'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사회정치적 문제에 소홀하지도 않았다. 도시 곳곳은 초토화되고 있는데 담당 고위직은 "사태가 안정되고 있다"며 무책임한 브리핑만 반복하고 좀비들의 공격을 줄기차게 '시위대의 폭력행위'라고 보도하는 뉴스 화면은 절망감마저 안겨준다.
기차 안에서 살아남은 승객들 무리가 뒤늦게 합류한 주인공 무리에게 ‘감염’을 의심하며 좀비들이 우글대는 곳으로 밀어내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끔찍한 이기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다소 도식적이고 과장되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은 아쉬움도 남는다. 특히 진희(안소희)가 악다구니를 하는 승객 무리에 대고 “저쪽이 (좀비보다) 더 무서워”라는 대사를 할 때는 감독의 의도가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듯하여 민망하다.
영화 '부산행'은 흥행 요소를 고루 갖춘 재난영화임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좀비'다. 영화의 흥행 파괴력은 바로 '좀비'의 활약에서 뿜어져 나온다.
흔히 '부산행'과 비교 대상이 되는 영화는 비교적 최근에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진 '월드워 Z'다. '월드워 Z'에서는 좀비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장관이 펼쳐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국경에 쳐 놓은 높은 벽을, 좀비들이 가공할 만한 속도와 의지와 체력으로 기어오르는 장면이다. 그런데 '부산행'에서도 이 비슷한 장면이 별 어색함 없이 펼쳐진다. 대한민국의 좀비도 이만큼 할 수 있다는 성취감에 짜릿해진다. '부산행'의 흥행에는 이러한 자부심이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부산행'의 진정한 주역은 좀비를 연기한 백여 명의 단역들이다. 주연배우들을 제치고 훨씬 뛰어나고 성실한 연기를 하고 있다. 표정과 몸짓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았음이 보인다. 단역들을 좀비로서 이만큼이나 단련한 것만큼은 그 어떤 찬사의 말도 아깝지 않다.
'부산행'의 '천만' 영광이 좀비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또 다시 한국 땅에서 화려하게 펼쳐질 그들의 활약을 기다릴 것이다. (2016년 7월 작성)
영화 : 부산행 (2016, 대한민국)
OTT : 디즈니+, 쿠팡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