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로 보는, 韓·日 두 나라의 '빚잔치'

[책册 vs 상像]

by 무덤덤


일본 소설 '화차' 속 여주인공은 왜 도망치나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 속 세키네 쇼코는 유령 같다. 소설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직접 등장하는 장면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딱 한 번뿐이다. 그나마 대사도 없다. 소설의 화자인 혼마 형사가 그녀의 모습을 잠깐 살필 뿐이다. 굉장히 딱딱하고 치밀하며 건조한 문체의 소설임에도 독자들이 높은 집중력을 갖고 이 책을 끝까지 붙잡고 있게 만드는 힘은 세키네 쇼코의 미스터리한 인생에 있다. 손에 잡힐 듯하지만 자꾸만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쇼코는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1. 쇼핑, 현금서비스. 계속 편하게 쓴 겁니다



거품경제가 꺼진 직후의 90년대 초 일본은 신용카드 발급의 남발, 대출의 급증으로 서민의 채무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해 사회문제가 됐던 시대라고 한다. 남의 나라 사정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굉장히 낯익은 풍경이다. 이러한 일본의 혼란은 IMF를 거친 후의 한국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 약 10년 차이로 한국도 카드 빚 잔치를 벌이느라 몸살을 꽤 심하게 앓았다. 지금은 그 빚이 카드값에서 집을 얻는 데 더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 바뀌었을 뿐 빚 잔치는 여전하다. 영화 '화차'에는 그 빚으로부터 도망치는 차경선(김민희)이 있다.


소설 '화차'는 형사 혼마가 주인공이다. 그는 거의 남이라고도 볼 수 있는 세키네 쇼코의 흔적을 쫓는다. 혼마를 움직이기 시작한 건 아주 작은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혼마는 쇼코를 쫓으면 쫓을 수록 한 여인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은 어떤 흠모라기 보다는 '탐구'에 가깝다. 한 여인에 대한 탐구는 곧, 당시 일본 사회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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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는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영화 '화차'는 소설보다 훨씬 뜨겁다. 차경선을 추격하는 사람은 약혼자이며 그는 그 누구보다 차경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홀연히 사라진 약혼녀를 찾아 헤매는 장문호(이선균)는 내내 울부짖고 절망하고 애가 탄다. 그러나 소설 속 약혼자는 자기가 알던 쇼코가 다른 사람을 사칭했다라는 사실을 알고 미련 없이 바로 상황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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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친척 집까지 찾아가서 돈을 갚으라고 위협…


영화 속 장문호는 더 적극적으로 차경선을, 아니 차경선을 사칭한 자신의 약혼녀를 찾아 헤맨다. 그러니까 영화 '화차'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처참한 인생을 살게 된 한 여자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 여자를 찾는 과정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가장 극적으로 묘사된 장면은 바로 빚쟁이들이 찾아와 한 가정을 무너뜨리는 모습이다. 이 장면만큼은 한국과 일본이 다르지 않다.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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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이 났을 때 발휘하는 초인적인 힘


소설 속 세키네 쇼코(진짜 이름은 신조 교코)와 영화 속 차경선, 두 여자는 많이 다르다. 성격도 물론이고 처해진 상황 자체도 온도차가 느껴진다. 쇼코는 보다 냉정하며 차분하고 약간은 악랄하다. 차경선은 좀 더 처연하다. 그녀는 그야말로 계속 도망친다. 불행에서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가 끝내 벼랑 끝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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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묘사하는 방식이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 다르다. 소설은 혼마의 생각을 서술함으로써 매우 건조하게 살인의 순간을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살인 장면은 참혹하게 그려졌다. 한 사람의 목숨줄을 끊는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인지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차경선에게 또 한번 연민을 갖게도 한다.


#5. 고뇌의 빛도 고독의 그림자도 엿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신조 교코와 차경선, 두 여자의 최후는 어떨까. 신조 교코는 소설 속에서 내내 유령처럼 부유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은 끝이 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된 신조 교코는 도도하고 여유로우며 더 완벽하게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사람이다. 혼마에게 정체는 곧 밝혀지겠지만 그 전에 소설은 끝이 난다. 교코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다.


그러나 차경선은 벼랑 끝까지 몰렸고 그 끝에서 결국 몸을 던져버렸다. 사랑했던 장문호의 절규를 마주한 차경선은 그 순간 어떤 희망도 의지도 모두 놓아버린 듯하다. 그녀에게는 붙잡을 지푸라기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 차경선의 투신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선택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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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의 삶으로 드러나는 두 나라의 치부


일본의 소설과 한국의 영화는 한 여자의 인생을 추적하면서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드러나는 시대의 아픔은 아주 닮아 있다. 대략 10년 차이로 반복되는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이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을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두 여자가, 아니 수많은 다른 불행한 채무자들이 빚의 수렁에 빠지는 첫 걸음은 비슷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소설 '화차' 속 이 문구가 대체로 함의한다.



파랑새(행복)는 먼 데가 아니라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고 동화는 얘기하지만, 정작 살다 보면 행복은 너무 멀 뿐만 아니라 누리더라도 찰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 돈이 제법 든다는 것도 깨닫게 되는 이치 중에 하나다. 그것은 속절없이 맞닥뜨려야 할 잔인한 현실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대처하고 버텨야 한다.

(2017년 6월 작성)


제목 : 화차 (2012, 대한민국)

OTT : 넷플릭스,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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