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에게
그건 이를테면 내 삶에서 몇 안 되는 어울리지 않는 객기였어. 세상의 객기가 그러하듯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씁쓸한 뒷맛을 잊을 수가 없어. 문득문득 그 날의 햇볕과 온도같은 것들이 느껴지거든. 정확하지 않아서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해지는 이 느낌은 앞으로도 더 선명해질거야.
중학생 여자애들 여럿이 모여 속닥거리던 중이었어. 나는 내 안의 내가 몇인지 알 수 없는 그 나이대의 여자애로서 '조금 빨리 자라서 차분한 여학생'의 모습-'치기어리다'같은 단어를 구사하면서 정체성의 허기를 채우는 것을 즐기는-으로 앉아 있었지.(혹시 알고 있었을까 넌?)
"그런데 A가 B를 좋아한다"
그 당시 우리에게 가장 흥분되는 사건이 수다거리로 던져졌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짐짓 그런 쪽에는 거리를 둠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었던 나는 이제 더이상 '조금 빨리 자라서 차분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린거야. 왜냐면 내가 B가 되었거든.
정확한 말들은 기억나지 않아. 다만, 누군가 확인해 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부추겼고, 갑자기 들이닥친 속박 앞에서 현명하지 못했던 난 동조했던 것 같아. 때마침 뒷문으로 들어서던 너에게 무턱대고 아이스크림을 사다달라고 했고 갑작스럽고 무례한 내 요구에도 넌 아이스크림을 사다주었지.
흔히들 사고의 순간에 시간과 공간이 멈춘다는 표현을 하는 것처럼 네가 내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던 그 순간이 내겐 사고였던 것 같아. 넌 우리 대화를 듣지 않았지만 아이스크림을 사다달라는 요구에 상황을 알아챘던 거야. 그리고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네 자존심보다는 내 치기를 지켜주었지. 그 시절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은 절대 못하는 그런 거였어. '조금 빨리 자란'다는 것이 너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 솔직히 말하면 네 이름부터 얼굴, 키, 눈동자 색깔 그 어느 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눈빛이 기억나. 살짝 실망한 듯, 안타까운 듯, 상처입은 듯, 어느 편으로는 다행인 듯.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그 눈빛. 또래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난 후회했어.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 잘못했다는 것을. 그 사고 덕에 난 누군가에게 내가 가장 빛나고 있었을 그 시간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 그 날 이후 너랑 내가 어땠는지가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거든. 파편같은 기억들을 애써 짜맞추자면 그러고 얼마 있다가 네가 전학을 갔던 것 같아. 정말 그것뿐이야 내 기억은.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두둔하자면 그 때 난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줄은 알아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품는 법을 몰랐어. 경험이 없었다고나 할까. 물론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질타하자면 (언제나 부정하고 싶지만)한 사람으로써 나의 그릇이 그닥 훌륭하지 못하다는 소리지. 그리고 트라우마들이 그러하듯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도망치듯 멀어지는 것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관계를 망치곤 했어.
이상하게 문득 그 날이 떠오를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어.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다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넌 나에게 마음을 고백했을까?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떠냈던 친구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척'하고 '체'하느라 바빴던 나의 어디가 넌 좋았을까?
맞아. 난 사실 아직도 똑같아. 사실 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가장 궁금한 건 그거거든. 내가 왜 좋았는지. 수없이 누군가를 내 마음에 들였다가 다시 내보냈지만 다른 사람이 날 마음에 품는다는 것이 여전히 사건이야. 그리고 스스로 망쳐버렸던 소중한 그 시간을 선명한 영상으로 복원하고 싶고 사는 내내 들여다보고 싶어.
고마워. 다정함이라는 것에 실재가 있다면 난 그 날의 너를 다정함이라고 할거야. 그리고 세상의 부모들이 그렇듯 내 딸에게 알려주려 해. 다정함을 지나치지 않도록, 다정함을 알아채도록. 그건 축복이고, 행운이고, 행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