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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하루 라틴어 공부

by 박인식

하루 라틴어 공부

김태권 지음

도서출판 유유

2024년 12월 24일


큰애가 짐나지움에 들어가면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랐으니 독일어야 불편함이 없는데, 영어에 스페인어에 라틴어까지 공부하려니 꽤나 힘이 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라틴어를 한 번 배워볼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책을 좀 보여달라고 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격려할 겸도 해서 큰애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했다.


서울에 돌아와 온라인 강좌 몇 개를 찾아 놓았다. 아무래도 학원 강의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는 딱히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일이 없다는 건 언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 결국은 라틴어 배운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큰애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음 해 봄에 갔을 때 내 생일 선물이라며 작은 라틴어 사전을 하나를 내밀었다.


어느 날 만화가 김태권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라틴어 이야기가 나왔다. 늘 말수가 적어 듣고만 있던 선생은 내게 라틴어를 배워보겠냐고 물었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인문학 만화가라는 평가를 받는 김태권 선생은 역사와 예술을 주제로 한 만화를 수십 권 출간했고 누적 판매 부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워낙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만날 때마다 감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라틴어를 가르쳐주겠다는 말은 조금 뜬금없어 보였다.


일고 보니 김태권 선생은 대학원에서 서양고전학을 전공하면서 그리스와 라틴 문헌을 공부했고 호메로스를 4년에 걸쳐 강독한 전문가였다. 이야기 나누고 열흘쯤 지나서부터 라틴어 초급 문법 강의록을 보내왔다.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 공개하기를 권했고, 선생의 홈페이지에 연재를 시작했고, 그것이 며칠 전 <하루 라틴어 공부>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선생은 이런 글로 책을 시작하고 있다.


“‘라틴어를 공부하기로 손녀와 약속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책을 쓰신 박인식 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자주 쓰이는 라틴어 문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라틴어를 익힐 수 있는 글을 몇 편 써보았다. 글을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마침 유유출판사에서 읽고는 책으로 묶자고 제안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박인식 선생님 손녀를 위해 시작된 책이다.”


선생은 이렇게 애를 썼는데 나는 지금 애써 가르쳐준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매우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나 때문에 귀한 책 하나가 탄생했으니 그 정도면 미안함을 상쇄할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만 꺼내놓고 가르친 사람 보람 없게 만들어서 염치없다는 말이다.


사실 라틴어를 공부하고 싶었던 건 짐작한 대로 ‘폼잡기’ 좋기 때문이었다. 명언 하나를 떡 하니 적어놓고 그 밑에 주절주절 몇 마디 늘어놓으면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그럴 생각이라면 고사성어로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건 또 너무 고루해 보이고. 이렇게 생각한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닌지 어느 페친이 딱 내가 그리는 그 모습을 꼬집어 ‘세상에서 제일 못 봐줄 아재 모습’이라고 일갈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딱 그만큼 라틴어 공부를 하겠다는 게 켕기기는 하는데, 큰애와 약속도 있고 김태권 선생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선언해놨으니 안 할 수도 없게 생겼다.


이 책은 <하루 라틴어 공부>라는 이름답게 길게 잡아 5분 분량으로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저자가 의도한 대로 초급 문법까지 익히지는 못하더라도 끝까지 읽으면 뭐 하나라도 남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큰애에게 이 책 이야기를 해주니 신기한 모양이다. 얼른 읽고, 큰애에게도 보내야겠다. 다음에 만나면 이야기가 좀 되기는 하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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