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윌스
김창락 옮길
돋을새김
2007년 6월 15일
꽤 오랫동안 구약만으로도 성경은 완성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굳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당위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경은 오랜 시간에 걸친 편집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성경을 역사서가 아닌 신앙고백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서에 심취했고, 그로 인해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해 태어나신 분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그 무렵부터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 우리 삶의 모든 판단 근거는 예수의 삶과 말씀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바울의 서신서는 우리를 예수의 삶으로 초대하는 몽학선생 정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가 언급한 바울 배격론자처럼 바울을 예수 정신을 매장하고 예수 가르침을 철저하게 전복시킨 사람으로까지 여기지는 않았다.
저자는 우선 바울의 서신서로 알려진 신약 13권 중에 실제로 바울 저작인 건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7권이라고 전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어서 바울의 삶을 살피기 위해서는 바울의 선교 여정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서신서와 구분해서 보기를 제안한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바울의 행적을 자기 의도에 맞춰 편집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서신서가 복음서보다 예수의 삶에 더욱 근접한 기록이라고도 주장하는데, 이는 복음서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50여 년 후에나 기록된 것인데 반해 서신서는 그보다 25년 정도 앞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신서가 복음서보다 앞서 기록되었다는 게 정설이기는 하지만, 서신서가 단지 먼저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복음서보다 예수의 삶을 더욱 사실에 가깝게 기록했을 거라는 주장은 서신서와 복음서의 접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온 내게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저자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서신서가 차분하게 자기 생각이나 철학을 서술한 게 아니라 치열한 투쟁과 분쟁에 처한 이들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나 자신을 향한 적대자들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며,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을 인용했다고 설명한다. 나로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충분히 수긍할만한 논리였다.
“사람들이 서신서를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이는 특정 지역의 위기를 처리하기 위해 써 보낸 글이다. 바울은 여러 투쟁의 한복판에 선 이들이 제기한 물음에 답변하거나 적대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서신서를 구술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답변은 적대자들의 모습이나 주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 바울의 격앙된 목소리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냉정하고 담담한 철학자가 아니라 전투 태세를 갖춘 투사였다.”
돌이켜보니 바울의 답변을 끌어낸 질문이나 적대자들의 공격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은 채 바울의 말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그런 설교나 글도 드물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저자의 주장 중 가장 유념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저자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서신서 말고도 바울의 저작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그래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많이 다루지 않았다는 세간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뿐 아니라 서신서를 잘 살펴보면 상당 부분이 예수의 가르침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많은 이들이 서신서보다는 복음서에 더욱 치중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서신서의 답변을 끌어낸 상대방의 물음이나 공격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서신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증이 필요한 데 반해 복음서는 논증을 벌이지 않고 그저 예수를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수와 예수 공동체를 제대로 알기 원한다면 그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좋은 증인은 바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예수의 삶에 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면 서신서에 예수의 삶이 대해 그렇게 조금밖에 이야기하지 않는 건 무슨 까닭인가? 서신서는 예수의 삶의 의미에 대한 해설이 아니다. 서신서는 당면한 문제를 놓고 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데 필요한 경우에만 예수의 삶에서 끌어낸 자료를 사용했고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 말씀을 구사할 수 있었다. 성만찬, 이혼, 음식 규례, 전도자가 재정을 후원받는 문제에 그렇게 적용했다. 이런 직접 인용을 통해 바울이 제시한 게 후대의 기록들보다 예수의 가르침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이 논증되었다.”
인용의 전반은 수긍하지만, 저자가 주장한 대로 바울의 기록이 복음서를 포함한 후대의 기록보다 예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 논증되었다는 주장을 신뢰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책 머리에서 저자를 저명한 문화역사가이자 저술가로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 그가 신학자나 성서학자였다면 내 판단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삶에 그렇게 정통할 수 있을까? 나는 바울이 예수를 만난 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책 곳곳에서 바울이 예수를 만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다른 증인에게 자신도 예수를 목격한 증인인지 아닌지 검정해보라고 요구한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고전 9:1)’ 바로 이것이 바울이 이방 민족에게 파송되는 사도로서의 소명을 예수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보고할 수 있는 이유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본 사람들 중에 본인이 직접 증언한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은 바울이 유일하다. 바울이 직접 한 이야기 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 이후 4, 50년이 지난 뒤에 두 번째,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손을 거쳐 기록된 것들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모든 증인 가운데 오직 바울만이 부활한 몸이 어떠한 것인지를 서술했다.”
과연 그러한가? 그동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난 것 외에 대면하여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알아 온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의아하게도 저자는 서문에서 예수가 세상에 있는 동안 바울은 그와 같은 나라에 있었던 적이 전혀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유대 땅에서 태어난 예수는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바울은 길리기아 출신이며 시리아 다메섹에서 예수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것일까? 책의 상당 부분이 이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 모순을 풀지 못하면 저자의 주장 대부분은 무너지는데. 혹시 바울이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났다는 것인가? 환상으로 만나 예수의 가르침을 얻은 바울이 직접 만난 다른 이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단언하는 게 가능한가? 나로서는 요령부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뭘 놓친 건 아닐까 싶어 책을 세 번이나 읽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서신서가 물음이나 공격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에 바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음이나 공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 말고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이라면, 사도행전에서 서술한 바울의 모습이 바울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제삼자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서신서와 일치되지 않은 부분은 바울과는 무관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저자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바울보다 베드로를 앞세우기 위해 바울의 행적을 편집했다는 뜻을 행간에 담아두었다. 어쩌면 왜곡이나 조작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가는 바울의 행적이 로마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심지어 바울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까지 만든다. 누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바울의 관계를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적대적이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누가는 바울의 선교활동에 관한 몇몇 이야기에서 치고 빠지는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도망 다녔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곳곳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누가는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에게 보낸 첫 번째 사람이라고 말한다. 누가는 바울이 나중에 이방 사람들에 대한 그의 선교에서 서술한 모든 문젯거리를 미리 해결한다. 문제가 이렇게 해결된 후에 누가는 바울이 이방인 선교의 소명을 받도록 해두었다. 이처럼 베드로가 그 길을 준비한 이후에 바울이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소명을 베드로에 이어 이차적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다른 곳에서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의 근거는 논리와 심증뿐이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특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행적을 왜곡했다는 듯한 언급을 여러 차례 하고 있는데, 그 또한 논리와 심증뿐이다. 저자가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 수상자인 저술가로도 이름을 날린 것을 고려한다면 논리와 심증만으로 이러한 주장을 능히 펼칠 만하다.
이 책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다>와 함께 저자의 기독교 3부작을 이룬다. 이 책을 고르면서 나머지 두 권도 함께 읽을까 생각했다. 읽어 보니 저술가가 논리와 심증을 앞세워 성경에 질문을 던진 것이라서 충분히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이 책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래도 서신서를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관점에서 읽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 사도행전은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온전히 바울의 의사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앞으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겠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복음서보다 서신서를 앞세우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