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질학을 공부하고 지반 엔지니어로 살고 있습니다. 그 길에 들어선 이래 51년을 한 길을 걸어오고 있지요. 졸업하고 3년 국책 연구소에서 일한 이후 지금 회사로 옮겨 43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질긴 편은 아니었습니다. 뭐 하나 시작하고 제대로 끝맺음을 한 일이 없었지요. 오죽하면 아버지가 저를 용두사미라고 부르셨겠습니까. 아마 제가 이렇게 질기게 한 우물만 파게 된 건 아버지의 그런 질책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용두사미라는 딱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그러니 제 젊은 날은 용두사미였던 자신과의 투쟁이었던 셈입니다.
저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실제로 많이 쓰기도 합니다. 엔지니어와 글쓰기가 안 어울린다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일해온 조사와 설계는 늘 보고서로 마무리하는 일이어서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설계보고서 글쓰기는 일반적인 글쓰기와 여러모로 다릅니다. 일반적인 글쓰기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설계보고서는 소수의 특정한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무엇보다 해석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독자가 읽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는 설계 목적물이 제대로 구현될 수 없겠지요.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 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이 무미건조하고 형용사나 부사 같은 꾸밈말이 적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마 사우디 현지법인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정신적인 부담은 커졌지만 물리적인 시간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유 시간에 정신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려고 글쓰기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글 쓰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거기에 집중해야 하니 말입니다. 부임 이듬해인 2010년 봄에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글쓰기가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도 다음 카페를 개인 홈페이지로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이후에는 네이버 블로그를 거쳐 2020년 여름부터 브런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는 제 글의 첫 번째 독자이자 으뜸가는 애독자입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글을 올려놓고 나서도 계속 손질합니다. 글이 계속 바뀌는 것이지요. 그만큼 제 글을 많이 읽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써온 모든 글을 최소한 열 번 이상은 읽었을 겁니다. 백 번을 넘겨 읽은 글도 적지 않습니다. 읽으면서 계속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제 글쓰기는 제 생각을 거르고 다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십 년도 넘은 글을 읽곤 합니다. 그러면서 제 생각이 변해온 과정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는 사람을 신뢰할 만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러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고 상황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게 마련이니 그걸 탓할 수는 없을 겁니다. 중요한 건 생각이 바뀐 걸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그런 관점에서 이전에 써놓은 글을 자주 읽습니다. 물론 생각 바뀐 게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쓴 모든 글은 제 일기인 셈입니다. 그리고 일기는 읽기의 대상이고 말이지요. 읽어야 일기를 쓰는 의미가 살아나니 말입니다.
어제 올린 김태권 선생의 <하루 라틴어 공부>를 소개하는 글이 브런치의 천 번째 글이 되었더군요. 2020년 8월 29일에 브런치를 시작했으니 일주일에 다섯 편 정도 글을 올린 셈입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다음 카페나 네이버 블로그에는 퍼온 글이 적지 않았는데 브런치는 온전히 제 글입니다. 돌아 보니 부지런했네요. 아내는 그거 들여다보고 있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놀리기도 합니다. 물론 요즘은 덜 합니다. 그 덕에 번역도 하고 책도 쓰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 돈은 안 됩니다.
제 브런치에 구독자로 등록된 분이 331명. 누적 조회 수 26만 7천, 하루 평균 방문객 170명. 그때그때 중요한 이슈를 퍼다 놓고 조회 수 몇천을 올리는 네이버 블로그보다는 훨씬 알차고 좋습니다. 그래도 기왕 애써서 올린 글이니 조금 더 많은 분이 읽어주시면 좋기는 하겠습니다.
브런치 천 번째 글 올린 소감이 너무 장황했네요. 지루하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