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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2025.01.08 (수)

by 박인식

아침 묵상하는 데 문득 내 생각이 너무 경직된 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생겼다. 그리고 생각이 경직되었다는 게 이미 굳어진 정체성 때문은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 생각을 단문으로 올려놓으니 김석희 교수께서 “정체성이 하나라면 그렇겠지만, 한 사람에게 정체성이 하나만은 아닐 것이니 결국 그 모든 정체성의 총합이 그 사람일 것”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사람의 생각이 정체성의 총합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으니 생각이 경직된 게 정체성 탓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돌아보니 나는 오랜 시간 기독교인으로, 엔지니어로, 보수주의자로 살아왔고, 이젠 그것이 내 정체성이 되었는지 어지간해서는 생각이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김 교수께서 한 사람의 모습을 결정하는 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정체성의 합집합’이라고 여겨 생각이 유연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나는 ‘모든 정체성의 교집합’이라고 여겨 오히려 운신의 폭이 손바닥만큼이나 좁아진 것이다.


퇴근 무렵에 김 교수께서 “교집합인 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모순 없는 나를 추구하는 수도의 길이고, 합집합인 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모순된 나를 그냥 정리되지 않은 채로 끌고 가는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을 한참 들여다봤다. 깜냥도 되지 않는 내가 꼼짝없이 수도자가 되어 있었다.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수도자라니.


나는 얼른 칠십이 되고 싶었다. 칠십이 되면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欲不踰矩)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칠십을 눈앞에 둔 몇 년 전부터 물러서고 덜어내는 삶을 살기를 꿈꾸어오고 있다. 그러자면 절제가 필수적인데, 그것도 지나치니 강박이 되고 그것이 결국 마음이 원하는 바와 거리가 있어 얼마 전에 그것마저 그만두기로 했다.


이것이 혹시 모순 없는 삶을 살기 위해 교집합인 나를 추구하다가 힘에 부치니 모순된 나를 정리하지 않은 채로 그냥 끌고 가는 모양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모양이라니. 주제를 알아야지. 내게 칠십은 그저 잔칫상 받는 핑계나 되려는 모양이다.


종심소욕불유구_논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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