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정의하는 정체성 중 하나가 엔지니어라는 직업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갖게 된 원칙이 모든 결정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을 바꾸는 건 내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바뀐 결정을 설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 그러자면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글을 쓰는 큰 이유이기도 하다.
엔지니어라는 정체성이 만든 또 하나의 모습은 매사에 철저히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선택할 수 있는 경우를 모두 따져보고, 그것도 모자라 선택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해결책까지 세워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그런데 일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건 다섯 손가락을 채우기도 바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쓸데없어 보이는 계획을 세운다. 계획이 서 있으면 일이 틀어지더라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바로 추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먹고 잠깐 눕는다는 것이 아예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다시 눕기도 애매해서 씻고 자리에 앉아 묵상을 시작하는데 문득 계획대로 된 게 없는데도 이렇게 노년을 활기차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사무치게 감사했다.
이곳에 내려온 것이 6월이니 그새 아홉 달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보냈다. 일 할 기회를 얻은 것도 그렇고, 늘 그리운 동해바다를 마음껏 누리고 산 것도 큰 덤이었다. 일신의 안위만 생각하면 이대로 몇 년 더 지내는 것도 괜찮겠는데, 설 지나고 본사로 복귀하게 되었다. 평생 울타리가 되어준 회사에서 필요하다니 무슨 일인들 마다하겠는가. 더구나 사우디에서 무진 애를 썼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회한으로 남았던 일이기도 하니, 이것으로 필생의 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일까.
본사에서 두어 달 준비하고 현지에서 일 년 남짓 지내야 한다. 책임이 따르는 일이니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걱정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었을까. 번번이 틀어지는 계획만 세우고도 지금까지 잘 버텨왔으니, 그렇게 버텨올 수 있도록 지켜주신 분께서 또한 그 시간을 지켜주시지 않을까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