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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협력의 진화

by 박인식

로버트 액설로드

이경식 옮김

마루벌

2009년 4월 2일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면 늘 물러서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다. 맞부딪친다고 해서 매번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생긴들 그건 그거대로 해결하면 되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상황이 몹시 불편하고,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다 보니 대부분 내가 물러서게 된 것이다. 언젠가 고백했지만, 그건 내가 매우 소심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겁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누군가와 부딪칠 때 오히려 차분해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은 머릿속이 하얘져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게 매번 물러섰으면 그 총합은 실패로 귀결되어야 하는데, 뜻밖에도 나는 직장인으로는 천수를 누리고 있다. 물론 직장생활 오래 하는 게 성공의 척도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실패가 아닌 건 분명하지 않은가. 비록 소심해서, 겁이 많아서, 상대에게 밀려서 물러서기는 했어도, 나는 지금껏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된 까닭이 바로 이 물러섬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게임 이론에서는 이처럼 매번 물러서는 것이 결코 좋은 전략은 아니라고 했다. 받은 대로 되돌려주는 팃포탯(Tit-for-Tat) 전략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비록 이론으로 깨우친 것은 아니지만, 평생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과 너무 달라서 경제방송에서 인용한 이 책을 서둘러 찾아 읽었다.


미시간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게임 이론의 대가인 로버트 액설로드가 무려 40년 전에 출간한 이 책은 분량의 대부분을 게임 이론에 할애하고 있다. 읽기는 했지만 내게는 설명이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도중에 책을 덮을 뻔했다. 다행히 4부에서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정리해 놓았다. 관심은 있으나 게임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4장만 읽어도 저자 주장의 골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팃포탯 전략은 글자 그대로 받은 만큼 되갚아주는 전략이다. 상대가 협조하면 나도 협조하고 상대가 배반하면 나도 배반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게임 이론을 실증하기 위해 게임 이론 전문가 그룹을 초청해 대회를 열었다. 초청된 전문가 그룹은 ‘먼저 배신하지 않는 신사적 전략’과 ‘먼저 배신하는 비신사적 전략’ 중에서 선택해 대회에 임할 수 있었다.


‘신사적 전략’을 구사한 그룹은 먼저 상대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상대가 협조하면 자기도 협조하고 상대가 배신하면 자기도 배신한다. 단, 상대가 반응한 것 이상으로 반응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한 번 배신하면 자기도 정확히 한 번만 배신하는 것이다.


‘비신사적 전략’을 구사한 그룹은 1) 처음부터 끝까지 배반하거나, 2) 처음에는 배반했다가 상대가 반격하면 즉시 협조로 돌아서거나, 3) 여러 번 협조하다가 슬그머니 배반해보고, 그래도 상대가 적당히 넘어가면 계속 배반 전략을 구사하며, 배반 간격을 점차 좁혀가다가 상대가 반격하면 협조로 돌아선다.


결과는 놀라웠다. 상대가 협력하는 한 협력을 선택하는 것이 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다.


1차 대회에서 상위 8등 안에 든 그룹은 모두 신사적 전략을 구사했고, 하위 7개 그룹 중 신사적 전략을 구사한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2차 대회에서는 8등만 빼고 상위 15개 그룹이 모두 신사적 전략을 구사했다. 이때 8등을 차지한 그룹은 이 게임이 이후로도 계속되자 결국 도태되고 말았다.


비신사적 전략을 구사한 그룹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구사한 전략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이 대회에 참가한 그룹은 모두 게임 이론 전문가로 이루어졌다. 누구보다 게임 이론에 밝은 사람들이고 나름 최적의 전략이라고 구사한 것인데, 결과는 비신사적 전략을 구사한 그룹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1차 대회에서는 참가 그룹의 거의 절반이 비신사적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게임 이론 전문가조차 신사적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1차 대회의 결과를 보고서도 2차 대회에서 1/3에 해당하는 그룹이 다시 비신사적 전략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진행된 대회는 모두 게임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조건에서 치러진 것이다. 한 게임에서 만난 상대를 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내가 협조했는데도 상대가 협조하지 않을 때 상대에게 보복할 기회가 없으니, 이럴 때는 당연히 배반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게 이익이다. 게임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상대가 나를 배신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상대가 모두 비신사적으로 나를 대하는데 나만 상대를 신사적으로 대해봐야 손해만 볼 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에 따르면 게임이 오래 지속되는 한 상대가 배신할 때만 배신하고 그렇지 않으면 협조하는 것이 유익하다. 게임이 일회성에 그치거나 모든 상대가 나를 배반할 때는 내가 협조할 어떤 이유도 없다. 배신하는 것이 남는 것이다.


저자가 상당 부분을 할애해 설명한 게임 이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혹시 모를까, 저자가 쉬운 용어로 요약 설명한 4장의 내용만으로는 유감스럽게도 저자의 결론에 쉽게 동의되지 않는다. 이론으로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온 경험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양보하고 협조하는 것이 길게는 이익이 되더라는 경험 말이다. 그래서 4장 전체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무엇보다 게임이 일회성이라면, 다시 말해 한번 만나고 그만이라면, 상대를 배신하는 게 무조건 이익이라지만, 남은 생애 동안 상대를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이고, 사람은 죄짓고 못 산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한번 만나고 그만이라는 전제’는 기각되어야 한다.


‘신사적 전략’을 구사한다고 해도 상대가 배신한 것 이상으로 배신하지 않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도 그렇고 고조선의 8조법금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을 명시하고 있다. 동해보복법을 자칫 잔인한 복수극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사실 보복의 악순환을 피하기 위한 장치였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로 되돌려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 더 이상 보복할 수 없도록 제한한 것이다. 따라서 상대가 한 번 배반했다고 해서 내가 한 번만 배반해야 한다는 주장도 지킬 수 없으므로 기각되어야 한다.


모든 상대가 나를 배신할 때 나 혼자 협조하는 게 어리석은 짓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저자도 상대 중 5%만이라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내가 협조하는 게 더 나은 성과를 올리더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제도 기각되는 것이 마땅하다. 사는 동안 모든 상대가 악인인 경우는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인조차도 모든 순간 악행을 저지르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게임 이론의 대가인 저자의 결론이 얼추 내가 경험한 것과 맞아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신사적 전략을 구사하는 게 궁극적으로 내게 유익으로 돌아오더라는.


너무 아전인수격 해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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