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우리 교회는 이날 이마에 재를 바르고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예배를 드린다. 아침부터 그날인 줄 알았으면서도 퇴근길은 집을 향했다. 두 끼 먹는 것도 버겁게 여겨지던 것이 아침 점심 다 챙겨 먹고도 퇴근 때 배가 고팠다. 진이 빠지기도 했고, 집에 갈 이유는 백만 가지도 넘었는데, 그래도 교회 가는 길이 아닌 집으로 가는 길에 접어든 발걸음이 편안치는 않았다.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한동안 거실에 넋 놓고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 식어가도록 잔에 든 커피는 줄어들 줄 모르고. 노래를 틀어놓기는 했는데 뭘 듣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두어 달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 일을 보름 만에 마치려니 버겁기는 하다. 다행히 후배들과 손발이 잘 맞아서 어찌어찌 마무리 지을 수는 있겠다. 월요일에 들고 출장을 떠나야 할 자료이니 미룰 수도 없는 일. 사실 미룬다고 더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출근해 점심때 잠깐 한숨 돌리는 걸 빼고는 잠시 머뭇거릴 틈도 없이 리포트 쓰는 데만 매달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만큼 집중해서 일한 적이 있었나 싶다. 그러고 보면 머리 쓰는 데 상당한 에너지가 든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퇴근 무렵에 허기가 져서도 더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회사가 십여 년 본업에서 벗어나 외도한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외형에 집착하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영역까지 무리한 확장을 거듭했고, 회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적자가 누적되어 회생절차를 밟게 되었다. 회사의 주축 사업은 흔들림 없이 성장세를 이어 나가고 있는데 난데없는 외도로 주축 사업이 천덕꾸러기가 되고 객이 안방을 차지하고 앉은 꼴이더니. 일 저지른 객은 이미 배에서 뛰어 내리고 뒷수습은 애써 회사를 키워온 후배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현지법인으로 떠날 때만 해도 은행에서 대출 영업하러 찾아오던 회사였는데.
입사하고 44년 흘러오는 동안 별일을 다 겪었다. 그러고도 살아남았다. 아침에 회사 결정을 듣는데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불확실성 하나가 지워졌으니 말이다. 굳이 한마디 하라고 해서 그냥 지금껏 해오던 대로 하라고 했다. 고비고비를 그렇게 건너온 증거가 눈앞에 있지 않으냐면서 말이다. 사주의 전횡이 사라졌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생각해 보니 오늘은 이래저래 잘된 날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