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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게 불편합니다

by 박인식

한겨레말글연구소

한겨레출판

2018년 10월 26일


나는 아내를 만나 5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아내 이름을 불러본 기억이 없다. 연애할 때 아내는 이미 직장인이어서 ‘미스 최’라고 불렀고, 이후엔 어물어물하다가 결혼하고 바로 여보 당신이 되었다. 친구들도 동생들도 부모님도 ‘미스 최’였다. 아내도 그렇다. 내가 당시 학생이었으니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었고, 사실 호칭을 쓸 일도 없었다.


간혹 나를 ‘어르신’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 무임승차권 이름도 ‘어르신 교통카드’이고, 도서관에서 대출 키오스크를 사용할 때도 ‘어르신 회원’이라고 뜬다. 나 역시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는 걸 당연하게 여기긴 하지만 막상 ‘어르신’이라는 말만 들으면 온몸이 오그라든다.


이 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호칭을 다루고 있다. 호칭으로 인한 문제가 뭔지 살피고 그를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는 한데, 대부분이 호칭에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제목도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게 불편합니다>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어르신’이라는 칭호가 불편하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호칭이라는 게 이처럼 “적절하지만 불편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는 하겠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 한겨레는 대통령의 부인을 ‘씨’로 호칭했다. 그건 1988년 창간 이래 한겨레가 유지해오고 있는 표기 원칙이었다. 한겨레는 대통령 부인을 ‘영부인’이나 ‘여사’로 표기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겨레 독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고 나섰다. 문 대통령의 부인을 ‘씨’로 호칭하는 게 대통령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구독을 취소하겠다는 독자가 나설 정도가 되자 당황한 한겨레는 내부 의견을 수렴하고, 토론회도 열고, 독자 여론조사도 했다, 여론조사 결과 독자들은 대통령 부인의 호칭으로 ‘여사’보다는 ‘씨’를 사용하는 게 좋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 부인에게는 ‘여사’라고 써야 한다는 의견이 훨씬 많았다.


호칭에 대한 불만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경우도 있겠지만 때로는 이처럼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니 “불편하다”는 표현이 반드시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겠다.


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가장 첫 번째 기준이 나이이다. 손윗사람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공손하게 대한다. 손아랫사람이면 일단 긴장은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물론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바보는 아니다. 살다 보니 사회적 대우를 가르는 데 나이에서 오는 연륜만큼 적절한 기준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저자 중 하나인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나이가 깡패인 나라’였던 이유가 “나이는 다른 무엇으로도 왜곡되지 않는 공평한 서열 기준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라고 말한다. 예전엔 정말 그랬다. 나이 든 사람이 존중받을 만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세상은 없다. 이유가 백만 가지도 넘지만, 노인들이 홀대받는 세상은 그들이 자초한 것이지만, 그래서 몹시 안타깝다.


오랫동안 대학에서는 학번으로, 직장에서는 직급으로 서열이 정리되었고, 그것이 대체로 나이와 비례해서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제는 대학도 나이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직급과 직책이 뒤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아 서열 정하는 게 혼란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윗사람 아랫사람 구분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만간 서로 존대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것이고, 그러면 이 문제는 자연히 풀리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은 친족간의 호칭이다. 핵가족이 보편화된 시대이니 복잡한 친족관계로 인한 호칭의 혼란은 이미 옛이야기가 되었다. 문제는 시댁과 처가의 호칭이 차별적이라는 데 있다. 며느리는 시댁 식구라면 손아랫사람에게도 존대해야 하는데, 사위가 처가의 손윗사람을 부르는 호칭도 존칭이 없고 손아랫사람이면 하대를 당연한 걸로 여기니 말이다. 여성이 가장 불쾌해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남편 형제는 시아주버님, 도련님, 아가씨까지 온통 존칭인데 아내 가족은 손윗사람에게도 처남, 처형이라고 하지 처남님, 처형님이라는 소리는 들어본 일이 없고, 손아래 처남이나 처제는 하대를 당연하게 여긴다.


금혼식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게 문제가 된 일도 없고 그걸 문제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처가는 모두 손위분들이어서 하대할 사람이 없었고, 친가는 모두 나이 차이 많은 동생들뿐이어서 아내가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르기는 했어도 동생들은 모두 아내를 어려워했다. 그래서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여성들이 결혼 후 호칭이 차별적이라고 지적하는 건 이해할 만하다. 당장 그를 대체할 만한 호칭이 무엇이 있겠는지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형제간이라면 서로 존대하는 것으로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핵가족인 시대에 형제간에 부딪힐 일이 얼마나 되겠으며, 그런 관계에서 문화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른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끼리 굳이 존대 하대를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 아닌가.


부모 자식 사이도 그렇다. 자식 결혼식에서 아들 내외가 우리에게 큰절할 때 아내와 나는 일어서 반절로 인사를 받았다. 한 가정을 일궈나갈 어른이 되었다는 걸 공개적으로 인정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사돈 내외께서도 흔쾌히 동의하고 함께해주셨다. 지금도 그건 참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신랑 신부가 엎드려 절하고 부모는 앉아서 절을 받는 건 꼴사납지 않은가) 물론 부모가 자식 내외에게 꼬박 존대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존대하는 건 아니더라도 존중을 담아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지.


스치듯 만나는 사람들에게 존중의 마음을 표시하는 건 존칭과 존대밖에 없다 보니 요즘 모든 영업장에서 존대어가 흘러넘쳐 오히려 혼란스럽다. “고객님께 커피가 나오셨다”는 정도는 다반사이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기상천외한 존대어가 난무한다.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끊임없는 데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미 옥스퍼드 사전에 올라 세계 공용어가 된 ‘갑질’이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싶다. ‘갑질’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라는 말이다. 저자가 “진상 고객을 응대하느라 진이 빠질 대로 빠진 감정 노동자가 식당 종업원에게 이것저것 지적하면서 분풀이하는 ‘서글픈 갑질’까지 일어난다”고 지적하고 있듯, 갑질은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귀국하고 한 달 아파트 옥상 방수 현장에서 잡부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무서웠던 건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었다. 흙먼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나는 길을 비닐로 덮어놓고, 보이는 대로 쓸고 닦았지만,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모멸을 당해야 했다. 그때 문득 왜 모두가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분노로 가득 찬 사회. 그러다 보니 시와 때에 맞지도 않는 존대와 존칭이 넘친다. 시끄러워지느니 차라리 존대하고 말자는 생각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겨레가 창사 이래 지켜온 대통령 부인을 ‘씨’로 호칭하는 전례를 독자들의 반발로 ‘여사’로 바꿨다. 그렇게 고귀한 존칭인 ‘여사’가 지금은 주방 노동자, 청소 노동자, 판매 노동자에게 두루 쓰이고 있다. 존칭이며 존대가 부질없는 일이고, 그것이 문제의 본질도 아니라는 말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의 뜻이 없으면서 존칭을 사용하고 존대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존중의 뜻 없이 사용하는 존칭과 존대를 상대가 고마워하기는 할까?


책 말미에 대안을 제시하기는 했다. 표준 언어 예절을 정비하고, 새로운 용어와 표현 체계를 개발하고, 교육과 홍보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했으니 해결방안도 함께 제시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건 본질을 간과한 결과로 생각한다. 본질은 상대에 대한 존중, 더도 덜도 아니고 그렇지 않을까 한다. 그게 갖춰지면 호칭이 문제겠나, 존대법이 문제가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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