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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29

by 박인식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스물아홉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대학의 교목이면서 신학자인 이가 치매 아버지와 생활하며 겪는 일을 신학적으로 풀어낸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를 읽었습니다. 저는 치매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져 돌아가시기 전에 약한 치매 증상을 보이셨거든요. 제겐 태산 같은 큰 분이셨던 아버지가 그러신 모습을 보았으니 왜 안 그랬겠습니까. 주변에서도 이 책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가깝게는 내 부모의 일일 수 있고, 조금 멀게는 내 자신의 일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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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김혜령

IVP

2024년 12월 30일


나는 유난하다 할 만큼 나이 들기를 기다렸다. 기다린다고 오지 않을 나이가 오는 것도 아니고, 마다한다고 올 나이가 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들면 못된 성정이 갈리고 닦여서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점점 걱정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치매이다.


나는 치매가 매우 두렵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쓰러지시기 얼마 전 치매 증세를 보이셨다. 혈관성 치매였으니 피할 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태산 같으셨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치매를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치매 대부분이 치료 불가능한 알츠하이머 치매라지만 손 놓고 맞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치매에 좋다는 건 다 해보고 있다. 치매를 다룬 책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


대학의 교목이면서 신학자인 이가 치매 아버지와 생활하며 겪는 일을 신학적으로 풀어낸 책이 보여서 구매목록에 올려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교우가 주일에 책을 가져다줬다. 잠시 살펴보고 있는데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한 교우가 며칠 전 그 책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고도 했다. 모두들 관심이 많다. 내 부모의 이야기일 수 있어서, 혹은 내 이야기일 수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고 두 달쯤 되었을 때 서둘러 부모님과 합가했다. 당장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언제건 단 한 번의 사고로 두 분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식의 관심을 고마워할 줄 알았던 부모께서는 이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다. 그런 제안만으로도 자신들의 삶이 실패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버지는 한국 교회 부흥기를 살아낸 목회자답게 자기 돌봄을 희생해가며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았고, 저자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자기 행동을 제약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게 할 만큼 성평등 사고가 잘 작동한 분이었다. 그런데 합가한 후 사위가 요리하는 모습을 안절부절 바라본다. 저자는 그 모습을 ‘무의식이 장악하고 있는 남성성의 발로’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가부장제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아버지가 평생 가부장으로 살았음에도 성평등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은 학습의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새롭게 학습한 성평등 사고는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깨어있을 때 제대로 작동했을 뿐, 치매에 걸리자 학습의 결과는 소거되고 그 결과 성차별이라는 원초적 무의식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가부장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전문인’으로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단순히 자기 지위만을 독점적으로 누리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를 성실하게 짊어지고 왔다. 그는 가부장과 목사로서 자신의 ‘위계적 특권’을 지켜내면서도 가족과 교인의 안위를 지키는데 적지 않게 이바지했다. 가부장 남성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무에게나 막무가내로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과 명예를 이미 차지하고 있으므로 가족과 학생, 교인에게 너그러운 관용으로 자기 인격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데 보람을 느끼며 이미 차지한 특권의 소득을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부양가족을 돌보는 데 쓰는 일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존재로 평생을 살아왔다. 남성 지배의 사회에서 남성 가부장은 그렇게 자기 남자다움의 죄수가 되고 은밀한 희생자가 되며 지배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의아하다. 어떻게 아버지가 가족과 교인의 안위를 지키는 데 ‘존재의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위계(hierarchy)적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 또한 가장으로 평생 가족을 지키고 내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데 존재의 의미를 두고 살았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 의무를 감당하며 살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 의무를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특권이라면, 그런 특권을 누린 것 또한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행간에서 “그 특권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가부장으로 사는 것이 ‘자기 남자다움의 죄수가 되어 은밀히 희생하는 삶’이라는 정의 또한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가부장의 삶을 희생으로 여긴다는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은 있으나, 그런 이를 만나본 일은 없다.


그렇기는 해도 그게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그 생각도 옳지 않은 건 아닌지 잘 모르겠다. 혹시라도 저자가 말한 대로 치매 때문에 ‘무의식이 장악하고 있는 남성성의 발로’로 성차별적인, 아무에게나 막무가내로 힘을 과시하는 모습이 드러날까 두렵다. 내 본질이었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고작 학습의 결과였다는 게 드러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자신이 부모님과 합가를 선언하고 남편이 그에 동의한 것을 두고 저자는 “남편이 보여준 합가의 헌신은, 위험에 처한 사람은 우선 살리고 보는 게 맞는다는 남편의 지론은, 그가 여성을 해방하는 페미니즘의 이념에 추동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애틋하게 여겨서 그 가족까지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의 확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구분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걸 구분하고 규명하는 게 페미니즘이라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페미니즘이 명확하게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글을 읽으니 더 모르겠다. “부부의 평등을 실현하는 일에는 핵가족 밖에 있는 배우자 부모까지 전적으로 책임지는 의무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설명은 오히려 망가진 자존심에 대한 자기 합리화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물론 그건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하지만 원하는 일만 하고 살 수 없는 것도 인생 아닌가.


저자의 글을 읽으며 천천히 늙어가는 데서 비롯되는 피할 수 없는 문제들,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가는 모습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직 타인의 도움에 크게 의존할 정도는 아니지만 늙어가는 데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를 실감하며 지낸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는지 찾고, 계단을 올라야 할 때는 난간을 찾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으레 경로석을 기웃거린다.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건 이미 오래되었고, 이제는 맛도 잃어간다. 이런 삶에서 존재 가치나 의미를 찾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치매를 과연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한 대로 결국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라고 무슨 중뿔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 믿음이 정말 크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말 선하고 바르게 살더라도,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하물며 그렇게 살지도 못한 나인 경우에야 더 무슨 말을 할까.


저자는 벌써부터 치매 보험에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에게 자기를 혼자 요양원에 보내 놓고 죄책감에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들어놓은 치매 보험금에 국가가 치매 환자에게 주는 급여를 보태 괜찮은 요양원에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데 노년을, 인생의 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늘 묵상하면서도 그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치매에 걸려 모든 게 무너진 내가 과연 나일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면 죽음을 당기는 걸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인가? 그것이 의미 없고 모두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내는 것보다 오히려 나은 선택이 아닌가?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겐가는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반론에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치매가 수명 연장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수명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치매 환자 또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때가 된 건 아닐까.


이런 내 생각과 달리 저자는 치매를 ‘정상 생활이 어려운 유병자’로 정의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현재 사는 공동체가 이들을 통제하면서 일구는 차별적 안전이자 평화가 아닌가 묻는다. 이어서 누군가를 집 안이나 기관에 가두어야만 이루어지는 인공적 안전과 평화, 그 매정한 상태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치매에 대한 내 생각이 어떻든 당장 논의를 시작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일은 틀림없다.


“‘배회’의 사전적 정의는 ‘목적 없이 걷는 것’이지만 ‘치매에 의한 배회’는 대부분 목적이 있다. 다만 환자가 본래 목적을 잊어버렸거나 혼자 찾아갈 수 없는 목적지를 설정한 것일 뿐이다”는 저자의 말은 새겨둘 만하다. 치매의 정의에 관한 것이고, 그 정의에 따라 우리 대응이 달라질 수 있는 일이어서 그렇다.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지우는 일은 현대인에게는 결국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나는 아버지의 모든 사회적 정체성 기억을 저편을 감히 봉인하고 이제 가족의 일원, 그러니까 사적인 존재로서의 정체성이라도 지키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말도 가슴을 찌른다. 백수를 바라보는 어머니께서 잘못 눌러 엉뚱한 곳에 전화하는 일이 잦아지자 최근에 어머니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여러 개 지웠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는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믿는 종교가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눠지고 고통을 멈추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삶의 종교”라는 저자의 말은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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