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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주소 이야기

by 박인식

디어드라 마스크

연아람 옮김

민음사

2021년 11월 26일


사우디에 부임하고 보니 주소가 없었다. 본사에서 우편물 보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주소가 없다고 하니 왠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냐는 반응이었다. 주소 대신 우체국 사서함을 이용한다고 설명하고 끝났지만,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는 주소가 없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사우디 수도라는 리야드에서는 201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주소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모든 우편물이나 소포는 집에서 받는 게 아니라 우체국에 가지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택배는 꿈조차 꿀 수 없는 환경이었다.


우리는 코로나가 사그라들 무렵인 2021년 말에 돌아왔는데, 코로나 때 주소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도시가 폐쇄되고 며칠씩 통행금지가 이어지는 동안 택배가 없었더라면 그 막막함이 더했을 것이다. 다행히 코로나 터지기 얼마 전에 주소 작업이 다 끝나 택배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주소가 없으면 뭐가 불편할까? 우선 우편물 배달이 불가능할 것이고, 요즘 생활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온라인 쇼핑도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주소가 없어서 일어나는 문제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결정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주소가 없으면 취직을 할 수가 없다. 입사서류에 주소를 적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입사서류에 주소 적는 게 뭐 그래 대수일까 하지만, 그건 주소가 있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기업에서는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뽑으려 하는데, 그러다 보니 노숙자는 그 관문에서 걸려 넘어진다.


우리 기업에서도 주소를 입사서류에 주소를 쓰지 않으면 대부분 접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소가 그다지 문제 되지 않는다. 주소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 사람이 그 주소에 사는지 확인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 기업에서 이를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입사서류에 적힌 주소가 사실인지 확인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


취직만 못 하는 게 아니다. 은행 계좌도 만들 수 없고, 여권이나 신분증도 만들 수 없고, 혼인신고도 받아주지 않는다. 신분증이 없으니 투표도 하지 못한다. (투표하는 데 신분증을 확인하는 건 아니고, 우편으로 통지하는 유권자 확인 안내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병원 예약도 우편을 이용해야 해서 집이 없으면 이 또한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대로 주소가 없는 곳에서는 우체국 사서함을 이용해 우편물을 받는데, 영국에서는 주소가 없으면 사서함을 이용할 수 없다. 말하자면 주소가 없어서 사용하려는 사서함을 얻기 위해서 먼저 (주소가 있어서) 사서함이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능이 주소에 숨어 있다. 부동산이 재산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주소가 없으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땅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당연히 사고팔 수도 없고 담보로 활용할 방법도 없다. 땅 주인을 특정할 수 없으니 세금 매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주소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게 아니다.


“탄트너는 그의 저서 <가옥 번호 House Number>에서 번지의 탄생은 18세기에 일어난 가장 의미 있는 혁신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번지(주소)는 길을 찾거나 우편물을 받는 데 사용하라고 만든 게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기능을 훌륭하게 발휘하지만, 번지는 원래 세금을 매기고 범죄자를 찾아 투옥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쉽게 길을 찾으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국가가 쉽게 사람들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실제로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에 내보낼 사람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집집이 번호를 매기게 했다. 모든 가구에 번호를 매기고 거주자 명단을 작성하게 해서 찾아낸 병사가 700만 명이 넘었다.


이처럼 세금을 매기고 병사 징집을 위해 만든 주소는 사람들의 삶을 여러모로 바꾸어 놓았다. 주소가 없으면 소통의 대상이 아는 사람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주소가 생겨서 소통의 대상이 훨씬 넓어졌다는 말인데, 살아가면서 얻는 큰 도움은 대체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고, 그래서 주소가 사회 발전을 촉진했다는 말이다.


‘느슨한 관계의 힘(strength of weak ties)’이라는 말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은 대체로 같은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고, 그러다 보니 서로의 네트워크가 겹쳐 내가 얻어낼 수 있는 도움이나 그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도움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지닌, 지금의 인맥과는 다른, 좀 더 넓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어 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소가 없으면 소통의 대상이 아는 사람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 벽을 깨는 것이 바로 주소의 힘이라고 말한다.


주소가 생겨서 사람들이 얻은 유익 중 하나가 우편 비용이 싸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우편 요금을 실제로 우편물을 배달하는데 드는 만큼 받았고, 그것을 수신자가 부담했다. 주소가 없으니 우체부가 우편물 배달할 곳을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집에 사람이 없으면 수신인이 제대로 맞는지 확인하지 못해 다시 방문하느라 시간을 뺏기고, 그러다 보니 요금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주소가 생기고 나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요금도 그만큼 줄어들었고.


주소가 생기고 나서 기대하지 못했던 유익도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저자는 주소가 공중 보건위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설명한다. 언뜻 주소와 공중보건이 어떻게 연결되나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더 쉽고, 예방의 첫 번째 단계는 병의 원인을 아는 것이다. 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필수적인 상세한 통계는 주소 때문에 가능했다. 1765년 영국 의회는 모든 가옥에 번호를 붙이도록 명령했다. 그 주소 때문에 골든스퀘어에서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사망자 대부분이 브로드스트리트 근처에 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중보건의는 집집이 다니며 죽은 사람들이 물을 어디서 길어왔는지 물었고, 사망자가 모두 브로드스트리트의 오염된 우물물을 먹었기 때문인 것을 밝혀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주소 체계가 지번 주소에서 도로명 주소로 바뀌었다. 어차피 같은 집인데 주소가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겠지만, 물류의 개념에서 보면 이는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사용했던 지번 주소가 위치를 표시하는 정적인 개념이었다면 도로명 주소는 여기에 흐름(물류)이 더해진 동적인 개념이 된 것이다. 힘에는 멈춰있는 힘과 움직이는 힘이 있다. 멈춰있는 자동차에 부딪히면(정하중) 충격이 작지만 움직이는 자동차에 부딪히면(동하중) 목숨을 잃기도 하지 않는가.


과거 사용하던 지번 주소는 건물이 생긴 순서대로 매기는 것이어서 지번이 왔다 갔다 하지만, 도로명 주소는 번호가 커지는 쪽을 바라볼 때 왼쪽에 홀수 오른쪽에 짝수를 매기고, 각각 20미터 간격으로 번호를 매겨나간다. (건물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소만으로도 찾는 곳이 얼마큼 더 가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서구는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개념을 우리는 2010년대에 들어서서야 정착되었다. 그때 마침 온라인 유통이 활성화되어 도로명 주소의 위력이 제대로 확인되었다. 지번 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바뀌지 않았더라면 온라인 유통이 활성화되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로명 주소가 온라인 유통 활성화의 근간이었다.)


어느 경제방송에서 소개하는 걸 듣고 읽게 된 책인데, 방송으로 들은 것보다 훨씬 흥미롭다. 여기서 소개한 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주소가 권력일 수 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거리 이름을 지키려는 사람과 바꾸려는 사람의 격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주소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미국에는 왜 숫자로 된 도로명이 많은지. 흥미로운 주제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주소 이야기에 정치, 경제, 역사, 거기에 의학적인 의미까지 담겨있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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