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31
작년 1월부터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서평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웹진을 알게 되면서부터 혹시 내 글이 실릴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뜻밖에 메디치미디어에서 번역서를 냈다는 이유 하나로 서평을 연재하는 과분한 영광을 얻었습니다. 오늘 서른 한 번째 글로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신통치 않은 글을 실어주신 메디치미디어 김현종 대표님과 신혜선 본부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중동 관련 책을 번역해 기회를 얻은 만큼 두 편에 한 편은 중동 관련 서적을 소개했습니다. 마지막 글도 그렇게 할까 생각했는데, 좀 더 뜻깊은 책이었으면 좋겠다 싶어 차별을 다룬 책을 골랐습니다. 공교롭게 차별을 바로잡을 주무부서 장관 후보자가 차별을 조장하고 갑질로 유명한 인사여서 소란스러울 때 이 글이 실렸네요.
저는 몇 년 전에 마지막 목표를 서평 천 편으로 잡아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서평이라는 이름은 가당치 않고 그저 책을 소개하고 거기에 제 생각을 곁들이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북리뷰라는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지금까지 <피렌체의 식탁>에 실린 서른한 편을 포함해 모두 350편 정도를 썼네요. 열심히 쓰기는 하는데, 긴 글이다 보니 읽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제가 아니지요마는... 그래도 좀 읽어주시면 제가 신이 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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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
정회옥
위즈덤하우스
2025년 5월 16일
타국에서 십 년 넘게 외국인 노동자로 살았다. 낯설고 물선 남의 땅이니 불편한 것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곳의 삶을 외국인 노동자라고 이름 붙이는 건 그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겠다. 오히려 한국이라는 이름이 자랑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타국에서 지내는 동안 국내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문제가 점점 심각해졌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일부 직종에 지나지 않았던 외국인 노동자가 이제는 노령화되어가는 노동력을 대신해 사회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이제는 농업 어업뿐 아니라 생산 현장, 건설 현장 가릴 것 없이 그들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종국에는 그들이 없어지면 식탁에 오를 수 있는 음식이 몇 가지나 남을지 모를 세상이 되었다.
외국인을 차별하는 걸 두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면서도 정작 우리가 올챙이였던 때를 기억하는 모습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찾으려고 들어도 남아있는 기록도 별로 없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저자는 <차별의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책에서 차별받는 이와 차별하는 이를 짝 지워 비교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차별받던 이와 차별하는 이가 모두 우리 자신이다. 파독 간호사로 차별받던 이가 조선족 간병인을 차별하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차별받던 이가 동남아 노동자를 차별한다.
기록에 따르면 60~70년대에 독일에 건너간 사람들은 광부 8천 명, 간호사 1만 1천 명으로, 이들이 10여 년 넘게 한국으로 보낸 돈은 1억 달러가 넘었다. 한 해에 몇백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경제 수준과 물가를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가득률이 100퍼센트이다 보니 그들이 번 돈은 그야말로 집안을 일으킬 수준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사돈 한 분이 간호사로 갔던 누님 덕택에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자식이 출석하는 독일 마인츠교회에는 광부로,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와서 은퇴를 넘긴 나이까지 사는 어른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들이 받은 처우는 사람마다 기억하는 게 다르다. 그렇기는 해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외국인 차별보다는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았다는 게 중론이다. 저자는 당시 우리 간호사들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간호가 전문 직업인의 일이 아니라 하녀의 일이나 가사 노동이었다. 한국 간호사들은 도착 다음 날부터 독일 환자들을 돌봤다. 간호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간병인이었다. 심지어 병원 청소나 독일 간호사 숙소 정리, 환자 식사 차리는 일까지 해야 했다. 그들은 언어 교육을 아주 조금 받았는데,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이 언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간호사 송출은 1976년 막을 내렸다. 임금이 상승하면서 간호사를 지원하는 독일 여성이 늘고, 임금이 더 낮은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간호사로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요즘은 친구들 모두 한 집 건너 하나씩은 간병인을 쓰거나 쓴 경험이 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는 분께 간병을 부탁드렸는데, 이제 병원에서는 모두 조선족 간병인들뿐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 달에 하루 이틀 쉬고 병원에서 숙식해도 손에 쥐는 돈은 200만 원이 안 된다. 식사를 돕고 가래를 흡입하고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24시간 윤번제로 근무하지만 유급 휴일을 제대로 얻지도 못하고, 휴가를 내려면 자비로 다른 간병인을 구해야 하고, 4대 보험도 적용받지 못하고, 재해보상도 받지 못한다. 근로기준법도 적용받지 못하고 예방과 안전대책도 없어 병원균에 감염되기도 한다. 환자 옆 좁은 곳에서 잠을 자고 끼니를 해결한다. 고용계약 없이 일하거나, 부당 노동을 요구받거나, 임금 체불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문득 가족을 독일에 간호사로 보낸 가정에서 조선족 간병인을 차별하는 사례도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래봐야 몇이나 되겠나만. 그래서 그것이 차별받은 사람이 차별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한다. 내가 올챙이인 적이 없으니 개구리 행세만 하는 것이라는.
해외로 나간 이주노동자의 효시는 아마 19세기 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간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삶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인 이주노동자들은 새벽 4시 반에서 늦은 오후까지 끊임없이 일해야 했다. 노동자가 나오지 않으면 관리자가 채찍으로 이들을 작업장으로 내몰았다. 점심시간은 단 30분이었으며, 농한기라는 게 없었다. 그들은 사탕수수 이파리를 잘라내고, 그렇게 쌓아놓은 사탕수수를 지고 가서 마차에 싣고, 농장에 물을 댔다. 사탕수수 잎은 톱날처럼 날카로워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데도 두꺼운 작업복을 입고 무거운 칼로 사탕수수를 잘라야 했다.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었다. 관리자들은 말 위에서 가죽 채찍으로 노동자들을 때렸다. 또한 게으르고 지저분하고 무례하고 신뢰할 수 없는 야만인으로 여겼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동남아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모습이 이들보다 나은가? 저자는 국제사회 기준으로 보면 인신매매 행위에 해당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버젓이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인신매매는 사람을 직접 팔고 사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강제적 착취가 바로 인신매매라는 것이다. 노동자 본인의 의사에 무관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말이다. 특히 농축업과 어업 이주노동자들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처럼 외부에 노출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학대 행위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건강했던 사람도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다 보면 건강이 급격히 악화한다. 오래 거주할수록 더 나쁘다. 91퍼센트가 과거에 질병이 없었으나 55퍼센트만 현재 질병이 없다. 본국에서보다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들이 38퍼센트이며, 작업 중 다친 경험이 20퍼센트, 작업으로 병을 앓은 경험이 15퍼센트이다. UN 특별보고관은 우리나라 사회보장 프로그램에서 이주민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고 보고했다. 내국인에서 외국인으로 위험이 외주화한 것이다.”
차별로 신음하는 이들을 한 번 더 옭아매는 것이 ‘불법 체류자’라는 덫이다. 고용주들은 미등록 이주자들을 더 적게 주고 더 통제하기도 쉽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들도 소득세를 내고 있으며, 그것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3년 6천억 원에서 2022년 1조 2천억 원까지 늘었다. 이들은 근로소득 연말정산뿐 아니라 종합소득세 신고, 일용근로소득 원천징수처럼 여러 방법으로 세금을 내고 있으며 소비에 부과되는 부가가치세도 당연히 낸다. 생산자이며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가 이주노동자가 노동력을 갖추는 데 이바지한 것은 별로 없다. 이주노동자가 한 사람의 성인 노동력이 되어 한국에 올 때까지 비용을 지불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해서 우리가 노동자를 불러들였고, 그들의 고된 노동의 열매를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배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바닷가에만 가면 어선이 모인 부두를 찾는데, 최근 다녀온 목포 부두에서도 그렇고, 속초항 죽변항 감포항에도 내국인 선원을 만나는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 되었다. 몇 년 전에 읽은 <깻잎 투쟁기>에서는 농산물 대부분이 이주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 간병인은 조선족, 얼마 전에는 서울시에서 필리핀 가정부 초청을 시범사업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미 이주노동자에 의지하지 않고는 사회가 굴러가지 않게 생겼다는 말이다.
저자는 30년을 노동 변호사로 살아온 김선수 대법관이 전원합의체 판결문 보충 의견을 인용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높이에 차이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물통에 담길 수 있는 물의 양은 가장 낮은 벽 부분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늘리려면 가장 낮은 부분의 벽을 높여야 한다. 가장 낮은 벽을 놔두고 다른 부분을 아무리 높여도 물의 양은 늘어나지 않는다. - 한 사회의 포용력은 그 사회에서 소수자 집단이 받는 대우와 존중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가장 낮은 벽 아래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하고서도 물의 양을 늘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차별에는 차별받는 사람과 그 차별로 인해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함께 존재한다. 가장 낮은 벽을 높이지 않으면 차별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야만적인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나라면 야만적인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야만적인 사회이니 말이다. 그런 야만인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과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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