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재난 불평등

by 박인식

존 머터

장상미 옮김

동녘

2021년 5월 21일


하루 세끼 먹는 게 사치였던 어린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꿈꾸기 어려웠던 일이고,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한다. 하지만 누리고 사는 것이 오래되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이 생기지 않았을까. 나라고 뭐가 달랐겠나. 다행히 십 년쯤 전에 사회역학 학자 한 분을 만나 사회적 약자와 불평등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만났다고는 하나 대면한 건 그의 북콘서트에서 개인적으로 가졌던 오 분 남짓한 질문 시간이 전부였다. 그렇기는 해도 자식 또래의 그로 인해 노년에 조금 더 의미 있는 사람을 살 게 되었고, 그래서 늘 그의 영향에 감사하고 있다.

그를 알게 된 이후 불평등에 관해 관심을 놓지 않았다. <재난 불평등>이라는 제목만으로 충분히 관심을 둘 만한 책이었고,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연재해와 같은 재난에 가장 취약한 계층은 두말할 것 없이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이들이다. 그렇게 짐작은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취약한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그들은 재난에 취약한 지역에 산다. 소외된 지역, 부실한 건물에서 살아 그 피해를 그대로 입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그래서 위험을 모른 채, 또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범람원이나 강변에 산다. 그곳은 공중위생이나 보건에 취약해 병에 걸릴 가능성도 매우 크다. 병에 걸리면 학교에 갈 수 없고, 돈을 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가난해지고, 가난해질수록 병에 걸릴 가능성은 더 커진다. 빈곤의 덫이 자가 증폭되는 것이다.”


“도시의 가난한 지역이나 가난한 수많은 도시는 건설 법규를 마련하고 집행하는 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채 급속하게 그리고 무질서하게 성장한다. 그런 곳에는 뇌물과 부패가 만연하다. 2008년 지진이 일어난 사천성, 2010년 지진이 일어난 아이티는 급속히 성장한 지역으로 공공건물과 학교 건물이 부실하기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이런 부실한 건축물을 두부 찌꺼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진이 일어나면 사람은 지진이 아니라 건물 때문에 죽는다. 집이 무너져 사망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건물은 다른 무엇보다 치명적이다. 이들은 재난이 일어나서 죽는 것이기는 하지만 재난 때문에 죽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죽음은 계수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난한 나라여서 더 많은 이가 죽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고 허약하거나 아주 어리거나 가난한 이들로, 경제적으로 그다지 생산성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총량으로 볼 때 거시경제적 성과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가 재난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은 가난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연구에 따르면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부유한 나라의 사망자 수는 가난한 나라 사망자 수의 3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성장이야말로 최고의 재난 경감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을 벗어나면 무엇이 달라지기 때문에 재난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는 재난 대비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기관이 없거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재난관리청이나 지질연구소나 해양대기청 같은 기관과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의 산물이며, 재난으로부터 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가난한 나라가 자국 과학자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지역 내의 위험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런 가난한 지역의 위험성은 그 지역보다 유럽처럼 지진과 태풍의 위험이 낮아 비교적 안전한 지역의 과학자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에서는 왜 위험을 진단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것보다 시급한 일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열대의 가난한 나라에서는 지진보다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이 훨씬 많고, 수질이 나빠 죽는 사람도 많다. 급수 시설 정비에 돈이 먼저 쓰여야 하고, 그게 더 많은 생명을 구한다. 태풍도 마찬가지도 대부분의 자연재해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재난이 일어나면 그 재난으로 인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하지만 저자는 불평등으로 인한 재난의 결과는 의외로 비슷하다고 말한다. 재난으로 불공평이 더욱 심화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부자에게 재난은 관심도 없고 약간 불편을 끼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재난으로 인한 충격을 완화할 능력이 있어서 근본적으로 소득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죽고, 심하게 다치고, 집을 잃는다. 이전보다 더욱더 고통받으며, 조금이나마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잃는다. 그들은 큰 타격을 받는데 정작 경제는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들의 경제활동은 집계되지도 않고 규모도 너무 작기 때문이다. 재난 때문에 부자들이 직접적인 이익을 보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 비해 잃는 것이 적고 더 빨리 복구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과 더욱 격차를 크게 벌릴 수 있다. 불공평한 사회가 더욱 불공평해지고 권력과 부는 더욱 편중된다.”


저자는 거기에 더해 권력과 부가 더욱 편중되는 건 단지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부자들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뉴올리언스 지배층들은 꽤 오랫동안 도시 안에 사는 골칫덩이 인간들을 치워 버리려 고심해 왔다. 카타리나 이후 허리케인이 빈민과 범죄자를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주택 담당관은 도시가 예전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렵겠지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지난 오랜 시간 그랬던 것처럼 흑인 천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뉴올리언스 되살리기 초안에서 일부 지역은 재건에서 아예 제외했다. 골칫덩이 인간들이 살던 거주지였다.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은 녹지로 바꾸어 백인 거주자들이 주말에 자전거를 타거나 여가 활동을 하기 좋은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부자들이 그곳에서 이득을 취할 기회를 발견한 것이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이 부자들의 탐욕이라고 일갈한다. 게다가 선진국에서 가난한 나라에 보내는 구호 기금의 실질적인 수혜자는 그들 자신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 또한 이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국에 공여하는 구호 자금으로 진행되는 일을 우리 사업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재난은 승자가 패자를 약탈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위험한 땅은 수용해서 더 나은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과학자는 이에 동의하고, 당국은 도시 재생이라고 이를 정당화한다. 아니면 피해복구 수준을 너무 높여서 이전에 살던 사람이 그 규제 수준에 맞추어 돌아올 수 없게 만든다. 패자는 이전에 갖고 있던 재산마저 잃고 승자가 그것을 취한다. ... 아이티 지진 이후 2억 달러에 이르는 구호 기금 중 아이티 기업에 배정된 금액은 2.5퍼센트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계약은 미국 기업이 가져갔다.”


저자는 이 책을 자연재해는 재난이 아니라 재난의 부정의가 더 커지게 만든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지배층이 재난의 결과를 통제하기 더욱 쉬워지며, 그래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취하는 행동으로 인해 불평등은 더욱 심화하지만, 재난은 그 자체로 숨을 수 있는 방패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정말로 자연현상이라고 믿을 것이라고 개탄한다. 시민이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읽으며 두 곳에서 잠시 멈칫했다.


저자는 “절망적인 사람은 절망적인 행동을 한다. 가난한 지역의 범죄율은 언제나 높다. 미국에서는 원주민 보호구역 내 범죄율이 전국 평균의 2.5배이고, 알코올 중독도 심각하다. 카트리나가 덮치기 전 뉴올리언스 빈민 지역의 살인율은 전국 평균보다 열 배 높았다”고 말한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진실로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마치 그 책임이 가난한 이들에게 있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책이라면 몰라도 가난 불평등이 재난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고발하는 이 책의 취지에는 맞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재난이 발생하면 강간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로 간주한다. 재난 이후 성범죄는 대부분 사회 질서의 혼란 때문에 일어나며, 이는 남성이 강간에 대해 변치 않는 욕구를 법적인 강제에 의해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재난 시기에는 이런 강제력이 사라지거나 약화하거나 다른 임무로 인해 밀려난 사건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약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러한 시각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몇 번을 확인해봐도 그랬다. 그 무엇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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