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커 베단텀
이한이 옮김
반니
2021년 7월 9일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를 거짓말이라고 여길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악의로, 사실이 아닌 걸 사실처럼 이야기하는 것’만 거짓말로 여긴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의로 한 것도 거짓말은 거짓말이고, 말해야 할 걸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 아닌가.
나는 누구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믿는다.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나 스스로는 평균적인 사람들보다는 그에 좀 더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될 일을 그러지 못해서, 말하지 않고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말해서 곤경을 자초한 일이 부지기수이다. 그렇기는 해도 정말 위기가 닥치면 나라고 뾰족한 수를 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 로버트 펠드먼의 연구에서 서로 초면인 사람들이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했는데 피험자들은 10분마다 세 번 정도 거짓말을 했으며 열두 번 거짓말 한 사람도 있었다. 저자는 많은 거짓말이 우리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거나 상대의 생각과 느낌에 맞춰주고 싶어 해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신경 쓰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위이며, 정직의 가치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 바로 다른 사람의 감정과 그 사람에게 충실하려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착각의 쓸모’라는 책을 리뷰하면서 웬 거짓말 이야기로 시작하나 싶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Useful Delusion’. 글자 그대로 ‘유용한 착각’이라는 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자기기만을 다루고 있고, 첫 장에 자기기만의 대표적인 사례로 ‘선의의 거짓말’을 다루고 있다. 그러고 나 자신을 돌아보니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거짓말’을 덜 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일지도 모르겠다. ‘거짓말’을 ‘선의’라고 ‘착각’하는 독자들 말이다.
저자는 자기기만이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지 자문한 후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에 매달리는 한 가지 이유는 때로 자기기만이 실용적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자답한다. 자기기만은 우리에게 유용한 사회적 심리적 혹은 생물학적 목적을 달성하게 해줄 수도 있으며, 잘못된 믿음을 고수하는 일이 반드시 바보 같은 짓도 아니고, 병리학적 징후도 아니라고 말이다.
“나이 든 부모님이 드라이브하고 싶어 하는데 해선 안 되는 상황이라면 멀쩡한 차를 두고 고장이 났다거나 수리해야 한다고 대답한다고 해서 가혹하다고 판단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목적이 그저 부모님을 사고에서 보호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건강한 성인에게 하는 거짓말은 정당화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종종 거짓말을 하는데 특히나 어떤 취약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한다. 이따금 도전을 앞둔 상황에서 도움을 주고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거짓말은 사교 예절로 이어지고,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도리가 되고, 자녀가 그를 따르지 않으면 부모에게 꾸중을 듣는 데까지 확장된다.
“광범위하고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거짓말과 기만은 흔히 사교상의 친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관심이 없는데도 상대에게 잘 지내느냐고 인사를 건네고 상대 역시 진실 그대로 대답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더 관심이 없을 때는 좋은 하루 보래라고 말한다. 음식이 끔찍이 맛이 없어도 저녁 너무 잘 먹었다고 한다. 와줘서 고맙다는 말은 이따금 절대 안 끝날 것 같은 저녁 자리가 드디어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거짓말은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기본 사교 예절이다. 아이들 역시 사회 상황에 맞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부모에게 꾸중을 듣는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라는 말이니,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도리이자 의무라는 말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레스토랑에서도, 우버를 이용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식사 비용을 말로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영수증을 가죽 덮개에 싸서 잘 보이지 않는 식탁 끄트머리에 놓는다. 우버는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의 기만을 보인다. 지갑에 손을 대지 않고 차량을 호출하고, 탑승하고, 목적지까지 가서 내린다. 돈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 모두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통으로 하는 비판은 그에게 여과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미국인들은 믿을 만한 대통령 얻기를 꿈꿨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대부분의 민주당원과 많은 공화당원이 대통령의 입과 뇌 사이에 여과장치를 설치할 수 있다면 하고 아쉬워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서 입을 좀 다물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을 사교 예절이라고 여기면서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내심 그런 허울을 벗어버리기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 대신 나서서 그것을 통쾌하게 깨부수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정작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니 사교 예절이라는 것이 사회를 원만하게 만드는 기제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기만행위가 왜 필요한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의 뇌 체계는 우리가 사교상 친절을 베풀도록 예민하게 조율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은 생존에 필수이다. 타인의 감정과 자존심을 짓밟았을 때 여론의 흐름이 여러분에게 불리한 경우 진실을 말하는 것이 도움이나 옹호할 만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부탁드립니다’와 ‘감사합니다’를 말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도 친절하고 관용적으로 굴라고,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손님이 와도 미소를 지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상당수의 기만이 인간 집단에 발을 들이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임을 직관적이고도 자동으로 잘 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역시 그런 기만행위를 하길 기대한다.”
“뇌는 수백만 년에 걸쳐 규칙들을 전달하면서 생존은 험난한 비즈니스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또 우리는 불필요하게 많은 적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 집단에서 예의는 인간이라는 종을 지배하는 행동 규칙을 반영한다. 우리가 사회를 헤쳐 나가는 데 거짓말에 어느 정도 기대는지 알고 싶다면 단 며칠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지내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사회적으로 무능하거나 잔인한 행동을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이 들면 망설이지 말고 말씀하시라. 그리고 누가 그걸 지적하면 이렇게 대꾸하시라. 끝말잇기에서 ‘알루미늄’으로 승부를 마무리 짓듯 더 이상의 논쟁을 막으실 수 있을 것이다.
“시한부 환자에게서 천국이라는 환상을 빼앗는 게 옳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