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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것저것

진보와 보수

by 박인식

어렸을 때 늘 말이 앞섰습니다. 벌이기만 하고 뭐 하나 제대로 매듭짓는 게 없었지요. 그래서 아버지께 용두사미라는 야단을 참 많이 맞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맺혔던 모양입니다. 철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면서 용두사미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 오명을 벗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제가 하겠다는 일을 미덥지 않아 하시니 “아범이 하겠다는 일 마무리하지 못한 거 봤느냐”고 하셨거든요.


그게 이후로도 그대로 굳어진 모양입니다. 마음먹고 뭔가 시작하고 나서도 어느 정도 결과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말한 걸 지키려 하기보다는 지킨 것만 말한 셈이니, 그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튼 그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말부터 앞세우는 사람을 몹시 싫어합니다.


물론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사회생활이 낙제점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가능한 한 엮이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요.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그런 제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저와 함께 일해야 했던 후배들은 더 조심스러웠겠지요. 모르기는 해도 뒤에서 욕깨나 했을 겁니다.


저는 태생이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제게는 장년 한국 남성으로 대표되는 그런 성향이 있지요. 그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성향이 아주 농후합니다. 저는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요즘 보수라는 용어가 아주 희화화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보수라는 게 그렇게 지탄받아야 할 모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보수와 진보를 속도의 차이로 이해합니다. 보수나 진보나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진보는 그 세상을 하루빨리 이루기 위해 문제를 무릅쓰고라도 무리해서라도 이루려 하는 데 반해 보수는 그것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보수적인 제 성향 때문이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세상을 바꾸려 하는, 결과적으로 말이 앞서는 이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과는 논쟁할 여지라도 있지요. 요즘은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진영 논리에 빠져서 상대를 원수 보듯 합니다. 무찔러 박멸해야 할, 존재해서는 안 되는 적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잘 알지는 못해도, 그게 원래의 진보와 보수가 갖고 있던 뜻이고 지향하던 바는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정확히 보수가 뭐고 진보가 뭔지, 그 둘은 서로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진보와 보수가 좌익과 우익으로 대체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책을 찾아보는데, 양쪽을 균형 있게 다룬 책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제목이 그럴듯해서 들여다보면 모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것뿐이네요.


요 며칠 이것저것 뒤져보고 있는데 마땅한 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쓴 책이 어디 없을까요? 진영 논리에 빠진 것 말고, 그렇다고 이도 틀렸고 저도 틀렸다는 양비론적인 시각도 말고, 진보와 보수의 유래라던가 관점의 차이 지향점의 차이를 잘 풀어놓은 책이 있으면 권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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