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중 외
더숲
2024년 2월 29일
사우디에서 지낸 13년 중 후반 6년은 소송 때문에 진을 빼고 살았다. 스무 개 가까운 공구 중에서 사업관리단으로부터 최상의 평가를 받았는데도 사우디 환경부는 부실시공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후반기 공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중소기업을 벗어나지 못한 규모의 현지법인에서 수백억 원을 받지 못했으니 회사 경영이 될 리 만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급여를 지급할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수년 치 월급도 받지 못하고 쫓기듯 사우디를 떠나와야 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다행스럽게도 월급이 나오지 않게 된 바로 다음 달부터 국민연금을 받게 되었다. 나는 1988년 국민연금이 생긴 이래로 사우디 현지법인으로 급여가 이관된 2010년까지 연금보험료를 냈는데, 만 61세 생일 다음 달부터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
우리 또래는 부모를 공양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으면 몰라도 또래 대부분은 부모가 대학까지만 보내줘도 감지덕지하던 세월을 살았고, 그렇게 맨손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자식 공부시키고 집이라도 장만할 수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만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적지 않은 재산을 모은 친구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노후 준비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은 여간 든든한 비빌 언덕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낯선 외국에서 수입도 없이 살아가야 했던 내게는 얼마나 큰 동아줄이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오히려 현직에 복귀해 젊었을 때 가졌던 열정을 되살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 그래서 국민연금이 더욱 고맙다.
오십 대쯤에 유럽의 연금제도를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 젊은이들에겐 유럽의 살인적인 소득세가 기피 대상이겠지만, 은퇴가 하루하루 다가오던 당시에는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소득세율이 50%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감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부분이 노후 준비는커녕 한 달 한 달 감당하기도 바쁘게 살았으니 말이다.
은퇴 후 받는 연금은 어느 정도면 적정할까? 은퇴했으니 쓰는 돈도 적어질 것이고, 세금도 적어지고, 노인에게 주어지는 이런저런 혜택도 만만치 않아 은퇴하기 전에 받던 월급의 절반이면 거의 같은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은퇴했으니 누릴 것을 포기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40% 정도로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국민연금이 생길 때 40년 연금보험료를 낼 때 생애 평균 소득의 40%를 받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다만 기준이 되는 소득은 은퇴 당시가 아니라 평균 소득이라는 점에서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를 소득대체율이라고 하는데, 국민연금이 생긴 게 40년이 안 되었고, 현재 평균 근속연수도 25년 정도에 불과해 실제 소득대체율은 25%에 지나지 않는다. 참고로 OECD 소득대체율은 50%, ILO가 권장하는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은 60%이다.
그런데 유럽 국가가 주축이 된 OECD의 소득대체율이 이렇게 높은 건 무슨 까닭일까? 프랑스는 소득대체율이 60%에 이르는데, 그것은 연금보험료가 우리나라 9%의 3배가 넘는 27.8%에 이르고 거기에 프랑스 정부가 부담하는 노인부양비가 한국의 7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소득대체율이 60%라면 앞서 말한 대로 은퇴 이전과 같은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은퇴 시기를 늦춘다는 정부 정책에 저리도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일하지 않고도 은퇴하기 전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연금을 넉넉하게 받는 나라는 그만큼 많이 내고, 거기에 정부도 더 많은 돈을 쓰기 때문이다. 도깨비방망이가 있는 게 아니라. 그러니 프랑스의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4.4%이고,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40.4%이다. 프랑스에 비해 무려 10배나 높다. 또한 OECD 평균의 3배, 노인 빈곤율이 높다는 미국 22.8%나 일본 20.0%의 2배 수준이며, 11%인 독일의 4배이다. 그렇다고 모든 세대가 그런 건 아니다. 한국의 10-50대 빈곤율은 15.3%로 OECD 와 비슷한데 65세 이상 노인 세대만 가난한 것이다.
이는 가입 기간이 너무 짧거나, 아예 가입하지 않아 수급 자격을 얻지 못한 연금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연금에는 저소득층을 돕기 위한 강력한 소득 재분배 기능을 넣었다. 국민연금을 최고액으로 내는 사람은 자기 연금의 약 1/4을 저소득층에 나눠준다. 240만 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180만 원만 받는 셈이다.
이처럼 좋은 취지에서 소득 재분배 기능을 넣었지만 많은 가입자의 불만의 표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월급쟁이 소득은 잘 파악할 수 있지만, 자영업자나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는 소득 파악이 잘 안되고, 특히 이들이 실제 소득보다 낮게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사례가 많다. 거기에 노후보장 때문이 아니라 수익률이 높은 금융상품으로 이용하는 소득 1백만 원 수준의 지역 가입자와 임의 가입자까지 소득 재분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기금 고갈에 대한 우려가 불거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국민연금이 상황이나 필요보다는 정치적으로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가입자의 반발을 부담스러워하는 정치권의 눈치 보기 때문에 연금 개혁은 말만 무성하고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더 내고 덜 받자는 것이니 누군들 찬성하겠는가. 게다가 국민연금은 17년째 개혁을 못 했는데 기초연금은 대선이 치러질 때마다 10만 원씩 오르다 보니 이제는 기초연금이 국민연금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연금 개혁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국민연금의 가장 큰 위기는 기금 고갈도 아니고 저출생 고령화도 아니며 바로 연금제도에 대한 가입자, 국민의 불신이라고 말한다. 사회보험제도는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데, 국민연금이 기금 수익률을 높이는 것보다는 의결권을 정부 뜻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놀랍게도 정부가 예산으로 써야 할 출산 지원금, 실업 지원금도 이 기금에서 지원한다. 같은 사회보험인데도 건강보험에는 10조 원 넘게 국고를 지원하고 국민연금에는 1조 원밖에 지원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논리를 옮기는 나도 연금 개혁안에는 선뜻 수긍하게 되지 않는다. 저자는 연금 개혁안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 특히 다음 내용은 이미 그 나이에 들어선 나로서는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안 중 수급 개시 나이를 3년 늦추는 안은 보장성을 심각하게 약화한다. 2021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4세이니 연금을 받는 기간은 19년 정도이다. 여기서 3년을 줄이면 실질적으로 연금을 16% 삭감하는 셈이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나이인 65세의 기대여명인 21.6년을 적용해도 연금급여가 14% 가깝게 삭감된다. 수급 개시 나이를 연장하는 건 기대 수명이 늘어나 더 오래 일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12년 80.9세였던 기대 수명은 2021년 83.6세로 3년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기대 수명이 아닌 건강수명에 직접 영향을 받는다. 한국인 평균건강수명은 2020년 기준 66.3세 불과하다. 수급 개시 나이를 68세로 늘리면 그야말로 은퇴한 이후 노후를 즐기기는커녕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소리밖에 안 된다.”
나는 국민연금 기금 재원이 보험료가 대부분인 줄 알았다.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걷어 그걸 운영해서 연금을 지급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2003년부터 2022년까지 미국의 모든 뮤추얼 펀드 6,499개 중 4위에 해당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정부가 국민연금 의결권을 기금 수익성에 맞추지 않고 정치 논리, 정파적 결정에 휘두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것만 바로 잡아도 수익성을 어느 정도 높일 수는 있겠으나, 그 정도로는 만회하기 어려운 구조적 결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기금운용에 대한 불신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사실 저출생 고령화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파급력이 더 확장된다는 걸 생각하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젠가 연금이란 가입자가 낸 보험료를 재원으로 삼는 게 아니라 젊은 세대가 낸 돈을 노인 세대에게 지급하는 구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기금 고갈은 큰 문제도 아니고, 이미 기금이 고갈 상태에 이른 선진국도 있다고 했다. 인구가 증가하던 옛날 같으면 그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돈 받는 사람보다 돈 내는 사람이 더 많고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구 감소를 넘어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할 지자체가 거론될 정도이니 설령 그런 구조라고 해도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독서 서비스인 크레마 클럽을 뒤지다 이 책을 발견했다. 연금 수혜 당사자로서 알아야 할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다. 읽고 나니 젊은 세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걸 누릴 만큼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서 이 문제에 대해 당당했는데, 앞으로는 입은 다물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겠다.